최고 권력자의 믿음을 깨트린 자

[태종 이방원 159] 충복은 짧고 충신은 길다

등록 2007.09.12 16:39수정 2007.09.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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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담장 궁궐의 담장을 넘으면 극형에 처 할 수도 있다 ⓒ 이정근


세자가 돌아온 이튿날. 축제와 같던 어제와 달리 음산한 공기가 대궐을 감돌았다. 피를 부르는 살벌한 바람이었다. 우사간(右司諫) 최순이 먼저 치고 나왔다.

"궁성을 넘어 들어간 구종수의 죄는 극형에 해당하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관전을 베풀어 귀양만 보냈습니다. 구종수의 부도한 죄가 또 나타났고 관계됨도 매우 중하여 죽어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습니다. 그의 형 구종지와 구종유는 모르지 않을 터임에도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신하 된 도리가 아닙니다."


형조참판 구종지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의랑에 출사한 문인으로 우사부 대간과 호조참의 그리고 경기관찰사를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다. 민무질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구종지는 민무질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구원을 요청할 때 야멸차게 뿌리친 인물이다.

"사람이 부도한 짓을 하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게 마련인데 더욱 곤제(昆弟)의 지친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명을 내려 구종수와 구종지·구종유를 잡아다가 한곳에서 빙문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음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을 경계하소서."

사헌부에서도 죄줄 것을 청했다. 유유상종하던 자를 배신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한 그가 이제는 동생의 죄에 연루되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투명하게 처리하여 후폭풍을 차단해야 한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주청을 즉각 받아들인 태종은 구종지와 구종유를 의금부에 하옥하라 이르고 경성(鏡城)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던 구종수를 의금부 도사 양로로 하여금 압송하라 명했다. 또한 지사(知事) 김사문을 공주로 보내어 이오방을 잡아 오게 하였다. 죄인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 구수회의가 열렸다.


"권보와 이법화는 옥에 갇혀 있고 이오방과 구종수는 잡아 오도록 했다. 이 무리들은 유희(遊戲)와 잡기(雜伎)로 동궁에게 아유(阿諛)하여 불의에 빠지게 하였으니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세자의 비행으로 4,5인을 형벌함은 내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오방과 구종수는 극형을 면치 못하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한 등(一等)을 감함이 어떻겠는가?"

"이같이 간녕(奸佞)한 무리들은 모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지침에 영의정 유정현이 반대했다.


"이승은 비록 양아버지 곽선의 첩을 세자에게 바쳤다 하지만 '세자의 음희(淫戲)한 일을 누설함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나도 비밀히 하여 발설하지 않고자 지신사(知申事)에게 명하여 이승을 채찍질하고 그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 - <태종실록>

"임금께서 하는 바는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는데 은휘(隱諱)하여 발설하지 아니함은 불가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기왕 터진 일.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처리하여 후폭풍을 차단하자는 뜻이다.

함길도 경성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던 구종수와 공주에서 유배생활 하고 있던 이오방이 잡혀왔다. 이들은 한양 도착 즉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먼저 구종지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구종수와 구종지는 순금사와 형조에 근무했던 관계로 의금부 중 하위직 관원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안면을 몰수하기 위하여 신참 관원을 투입했다.

세종의 장인 심온, 임금의 오른팔 이숙번, 줄줄이 연루되다

"죄인의 아우 구종수가 세자를 모시고 연음(宴飮)할 때 시중들던 기생은 누구누구이냐?"
"어리도 있었고 승목단(勝牧丹)도 있었습니다."

"승목단은 안수산의 첩기(妾妓) 칠점생(七點生)의 친구가 아니더냐?"
"그리 알고 있습니다."

"안수산은 심온의 자부(姊夫)가 아니더냐?"
"그리해서 심온을 찾아갔습니다."
심온은 판한성부사직에 있었다.

"무슨 청을 하였느냐?"
"아우 구종수가 세자전에 무상출입하니 공(公)이 그를 제지하여 주기 바랍니다. 고 부탁하였습니다."

심온과 구종지는 막역한 사이였다. 심온은 훗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의 장인이다. 세자가 궁궐로 어리를 불러들이고 궁 밖에서 구종수가 펼치는 연회에 기생들이 동원된다는 것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심온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똥이 심온에게 까지 튄 것이다.

"구종지는 말하라. 네가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폄소(貶所)에 있던 이숙번이 누구를 보내왔더냐?"
"가노(家奴) 수정과 그의 첩(妾) 김관도, 그리고 여종(婢) 금생을 보내왔습니다."
구종지는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문관들은 이미 세자가 토로한(태종17년2월27일)증거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구종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죄인은 무슨 연유로 폄소의 이숙번에게 사람을 보냈느냐?"
"활과 낭미(狼尾)를 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 부탁한 물건의 품목을 빠뜨리는가? 주리의 맛을 보겠느냐?"
심문관은 눈알을 부라렸다.

"양마(良馬)도 부탁했습니다."
순금사에 근무했던 구종수는 주리가 얼마나 혹독한 형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디에 쓰려고 말(馬)을 부탁했느냐?"
"세자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숙번이 너에게 보내온 서찰은 무슨 내용이었느냐?"
"이숙번이 유배 떠나기 전 사랑하던 첩 예빈시(禮賓寺) 여종 복중, 공안부(恭安府) 여종 약생과 기생 소조운(小朝雲)을 각기 그 사(司)에서 말미를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숙번이 그 청을 하면서 무엇을 보내왔더냐?"
"철갑과 투구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넌 무슨 답서를 보냈느냐?"
"'청과 같이 하였다'고 보냈습니다."

국가에 충성한자와 개인에게 충성한자

의금부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진노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유배지에서 근신해야 할 이숙번이 죄인과 사통하고 물품을 주고받았다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후사를 이어 갈 세자의 눈을 가리고 황음에 빠지게 하는 동력으로 사용되는 물건이 아닌가.

이숙번은 세자가 바른길로 가지 않으면 계도하고 편달해야 할 위인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정사공신의 본분이 아닌가. 그런데 세자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무리들과 내통하고 같이 놀아났다니 이숙번은 정녕 내가 믿었던 이숙번이 아니란 말인가? 가슴을 치고 싶었다.

태조 이성계의 비틀어진 길을 바로 잡기 위하여 혁명의 깃발을 치켜 올릴 때, 이숙번은 의가 통하고 혈기가 통하는 동지였다.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밤을 새울 때 그의 뜨거운 가슴을 확인했다. 혁명 깃발을 경복궁 근정전에 꽂을 때. 이숙번도 자신과 같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이숙번은 나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한 것이었다. 나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방원에게 충성하여 개인의 영달을 꾀했던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숙번은 나라의 충신이 아니라 개인 이방원의 충복이었단 말인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이숙번이다. 뭇사람들이 좌하륜 우숙번이라고 선망과 질시의 시선을 보내와도 끔찍이 챙겼던 이숙번이다. 비록 지금은 폄소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한양으로 불러올려 대임을 맡기고자 했던 이숙번이지 않은가. 깊은 배신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노한 태종은 충녕의 장인 심온을 의금부에 투옥하라 명하고 의금부부진무(義禁府副鎭撫) 박안의를 연안에 급파하여 유배생활하고 있는 이숙번을 한양으로 압송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숙번 #이방원 #의금부 #구종수 #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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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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