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직녀 설화, 직업선택 자유를 제한했다

'남경여직' 사상, 어떻게 전래됐나

등록 2007.09.21 14:18수정 2007.09.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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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잣고 있는 중국 여인. ⓒ 출처: 1637년 송응성 지음 <천공개물>


서로 열애하는 사이이지만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해마다 칠석날에, 그것도 까마귀들의 도움을 받아 딱 한 번밖에 재회를 할 수 없다는 견우와 직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저 동화 속에 나오는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중국·일본 등에 전해지고 있는 이 설화는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한 동아시아 전통시대 지배층의 논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설화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으로는 ▲남자는 소를 끌고 여자는 베를 짜며 ▲이러한 분업적 역할을 게을리 하면 옥황상제가 벌을 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견우의 직업을 ‘목동’이라고 기재한 동화책들이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설화가 최초로 등장하는 중국 고전인 <시경> 소아편에 나오는 견우(牽牛)는 목축업 종사자라기보다는 농업 종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보는 게 순리적일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한 시들을 정리한 <시경>이라는 책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중국은 유목사회가 아니라 농경사회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우경법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소 끄는 사람’이라는 뜻의 견우는 목동이 아니라 농민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더 역사적 현실에 부합할 것이다. 

견우는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고 직녀는 베 짜기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이해하면,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의도가 한층 더 명확하게 다가올 것이다. 남편인 견우는 집밖에서 농사일을 하고 아내인 직녀는 집안에서 베 짜기를 했으며 두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게을리 하자 옥황상제가 분노하여 벌을 내렸다는 이 이야기는, 바로 남경여직(男耕女織)의 분업적 사회시스템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의 반영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상소설 같은 견우직녀 설화를 문자 그대로 믿은 사람들은 과거에도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었을까?”라고들 하지만, 옛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설화가 전해졌다고 해서 그들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다”는 말의 뜻을 별 거부감 없이 이해하듯이, 옛날 사람들도 설화 속의 비과학적인 요소를 걸러내고 그 속에서 핵심적 메시지만 추출해서 이해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이래로 전통시대 사람들은 견우직녀 설화 속의 비과학적 요소에 빠져들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자는 농사일을 하고 여자는 베를 짜는 것이 순리’라는 관념을 은연중에 되새겼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음력 7월 7일 밤하늘에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것 같은 장면이 나타나면, 그것을 보면서 견우직녀 설화와 남경여직 논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중국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사회의 지배층이 남경여직의 사회적 분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수단에는 견우직녀 설화 말고도 여럿이 있다.


중국 학자인 옌중핑은 1966년에 쓴 <중국근대산업발달사>라는 책에서 “신농씨가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황제(黃帝)의 후비인 라조(螺祖)가 사람들에게 양잠과 실 짜기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중국인들에게 남경여직의 관념을 심어주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신농씨나 라조의 신화가 ‘남자는 농사일을 하고 여자는 베 짜기를 한다’는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한편, 국내의 어느 유력한 중국사 학자는 옌중핑의 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신농씨나 라조의 신화가 중국인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전통시대에 존재한 남경여직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옌중핑의 견해를 취하든 이 국내 학자의 견해를 취하든 간에, 신농씨·라조 신화와 남경여직 논리의 상관관계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인민들을 남경여직으로 유도하기 위한 중앙정부 차원의 장치도 설치되었다. 왕이 직접 농사일을 하거나(친경 親耕) 혹은 왕비가 친히 누에치기(친잠 親蠶)를 한 것 등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선잠단(사적 제83호)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삼청터널 쪽으로 10여 분 이상 걸어가면, 도로 오른쪽에서 붉은 색 대문의 선잠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왕비가 직접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는 친잠례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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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단. ⓒ 김종성


위와 같이 동아시아의 정치권력들은 견우직녀 설화 외에도 신농씨·라조의 신화 혹은 친경·친잠 등의 이벤트를 통해 ‘남자는 농사일을 하고 여자는 베 짜기를 하는 분업적 사회’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오늘날에는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가장 하고 싶고 또 가장 잘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과거의 전통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각각 특정 직업으로 일률적으로 유도하려는 사회적 장치들 즉 설화·신화·정치이벤트가 개발되었다.

그러한 장치들 중에서 동아시아에 가장 넓게 영향력을 미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견우직녀 설화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남녀 간의 애정문제에 대해서는 집중력이 극대화된다는 점, 해마다 칠월칠석에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육안 상으로 가깝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등에 착안하여 ‘남자의 역할은 농사일이고 여자의 역할은 베짜기이며, 각각의 역할을 게을리 하면 옥황상제의 벌을 받게 된다’는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옥황상제의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정확히 표현하면 정치권력의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예컨대 중국 등지에서는 베 짜기를 게을리 해서 법률에 정해진 수량의 베를 나라에 내지 못하면 그에 대한 법적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국 등지에서는 각 호구마다 부과된 직물 공납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여자는 좋든 싫든 베를 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베를 짜지 않으면 남편이 농사일을 포기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여자들은 베를 짜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는 사회적 강제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견우직녀 설화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에 이용된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정책이나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시험에서 이런 논리가 적용된다면 헌법 제15조 직업선택의 자유 위반이 논의될 여지가 있겠지만, 과거의 전통사회에서는 이 논리가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정치권력 입장에서 볼 때에, 농사일과 베짜기에 일정한 인력자원이 배분되어야만 정치권력이 조세징수를 통해 농작물과 직물을 일정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민들이 농사일에만 집중하느라 베 짜기를 게을리 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사용할 만큼의 베만 짜느라 잉여의 직물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정치권력 입장에서는 여간한 낭패가 아닌 것이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동아시아 정치권력이 택한 방법은 ‘남자는 농사일로 몰아넣고 여자는 베 짜기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어느 백성이 농사일을 잘하고 어느 백성이 베 짜기를 잘하는지를 중앙권력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난폭하고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남자는 이쪽으로, 여자는 저쪽으로’라는 이분법이 채택된 것이다.

만약 오늘날처럼 국민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거나 혹은 국민들에게 수시로 직업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견우직녀 설화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겠지만, 전통시대에는 그런 사회적 체계가 없었으니 남경여직 같은 ‘난폭하고 무식한’ 이분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견우직녀 설화는 필요한 농작물과 직물을 골고루 확보하기 위해 인민들에게 남경여직의 이분법을 주입시키려 한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남자는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여자는 집에서 열심히 베를 짜지 않으면 국가권력(옥황상제)의 행정적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전통시대 동아시아 남녀들의 낮시간 ‘생이별’ 즉 분업 시스템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견우직녀 #선잠단 #동아시아 전통사회 #분업 #남경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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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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