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국의 길, 가슴을 흔들다>
한국관광공사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왠지 그 배경이 되는 곳을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대학 시절 신경숙의 단편 소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의 배경지인 제주도 성산일출봉 근처를 방문해 보고는 그 낭만적인 풍경에 감동했던 적이 있다. 이외에도 시의 배경이 된 서정적인 공간, 현대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러 도시들을 쉽게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길, 가슴을 흔들다>는 이처럼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나희덕 시인의 <방을 얻다>라는 시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 <방을 얻다> 중에서이런 말에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 시인.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이름부터가 곱고 운치 있는 지실마을이다. 담 대신 꽃밭이 펼쳐지고 명옥헌 정자 앞 동백이 붉은 마을. 이 마을에서 조선 중기의 인물 오희도는 사각형 모양의 연못과 정자를 만들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안빈낙도 했다고 한다.
글과 함께 담긴 풍경들은 책을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만큼 고즈넉하다. 나희덕 시인의 마음을 애타게 했던 사람은 감 농사를 짓는 정선임씨인데 이 시 얘기를 들려주니 “시인에게 책도 빌려 보고 괜찮을 뻔했다”, “집의 정기를 지키기 위해 요즘엔 내가 안채에서 잔다”는 말을 던졌다고 한다. 마을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도 평화롭다.
아내를 잃은 슬픔의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시인 도종환은 최근 들어 불교적 세계에 심취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짓는다. 그 이유는 법주리 깊은 산 속에서 명상과 철학적 정신 수양에 집중하며 지내고 있는 시인의 삶에서 근거한다. 구구산방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사는 도종환은 시 속에 자연과 정신, 우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가 소개하는 곳 중에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는 바로 말무리 반도다. 말이 무리지어 달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파도가 치는 백사장, 남과 북의 경계, 통일 전망대와 이승만, 김일성의 옛 별장을 함께 둘러 볼 수 있다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다.
건봉사라는 절 아래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바다에서 가깝다는 뜻에서 해상리로 불린다. 박상우의 소설 <말무리 반도>는 화가인 ‘나’가 해상리 처녀 ‘선애’를 만나 말무리 반도를 소개받는 내용이다. 이 마을은 민통선 출입 통제소 곁에 있어서 해가 뜨면 논밭에 들어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검문소 밖으로 나와야 하는 비애를 갖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말무리 반도는 휘황하다. 말무리를 곁에 두고 파도가 철썩인다. 소설 속에서 ‘선애’가 ‘나’에게 ‘이곳을 떠날 때 나를 데려가 달라’고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갇혀 있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그대로 말무리 반도 역시 이녘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듯이 땅을 박차고 달릴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소설가 박상우는 실제로 이 작은 마을 해상리에서 몇 달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소설의 작가가 실제 체험한 일들, 실제 머무르던 곳을 토대로 하여 창작하는 일은 흔하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에까지 출제되고 이청준이라는 작가를 더 유명하게 한 소설 <눈길>, 시골의 향토적 서정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신경림의 시들 역시 그들의 고향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가에게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 공간이 곧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북한강 줄기를 따라 가는 길섶에 나타나는 모란 미술관. 그리고 미술관을 지나 숲 속의 길에 들어서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란 공원이 나타난다. 모란 공원은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묘지이고 미술관은 삶을 윤택하게 누리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적 전시의 공간이다.
이 두 요소의 경계, 삶과 죽음, 이 둘을 모두 아우르며 인생의 허무함과 삶의 질곡을 드러내는 소설은 바로 이승우의 <목련공원>이다. 모란 미술관 위쪽의 산자락 전체가 공원묘지인데 작가는 미술관에서 가끔 야외 결혼식이 열리는 걸 목격하고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참 한국적이고, 참 소설적인 장소, 너무도 아름다워서 공간 하나가 바로 시 하나를 탄생시키는 곳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장소들은 모두 숨어 있어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작품을 읽고서야 비로소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시인과 소설가는 이런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미학적 눈을 지닌 이들이다. 그들이 소설과 시를 통해 그려낸 세계는 평범한 시골 마을을 서정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거친 땅을 역사적 질곡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문학은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책의 저자처럼 나도 길 위에 서서 소설과 시의 내용을 음미하며 우리 국토의 흙내를 맡고 싶다. 작품의 이미지들이 툭 튀어나와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 사계절 내내 땅과 산, 물과 하늘은 그 매력을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길, 가슴을 흔들다
임동헌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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