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숙소, 노숙모드로 돌아갈래!

[자전거 세계일주 41] 멕시코 산 루이스

등록 2008.01.11 11:04수정 2008.01.3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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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고양이 사체. 이 정도면 그나마 무난한 수준이다. 창자가 다 터져나와있는 작은 짐승 혹은 구더기로 들끓어 있는 눈 떠 죽은 소, 경직된 자세로 누워 발 뻗어 있는 개들의 사체는 소름을 넘어선 공포를 야기한다. 가끔 도로 위에 압착되어 흔적만 남은 화석화 된 경우도 많다. ⓒ 문종성

멕시칼리를 벗어나 70km정도 떨어진 도시인 산 루이스(San Luis)에 가는 길. 명주바람에 실려 온 무미건조한 냄새만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오후의 여정이다.

좌로는 회뻘건 등살을 내보이는 민둥산이 건조한 피로를 급생성시켜주고 있고 우로는 넓게 펼쳐진 잡풀과 결고운 모래밭이 황량한 배경의 막막함을 주도하고 있다.


뻑뻑한 체인에서 나는 철컹철컹 거리는 소리는 이 길을 달리는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여기에 아스팔트 사이로 힘겹게 꽃을 피운 들꽃이 바퀴에 밟힐라 조심조심 피해 가지만 날벌레들이 자꾸 이마에 박치기를 해오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왜 나한테 달려드는 거야? 흡혈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행동, 서로에게 득 될 게 없잖아.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가뜩이나 잠 잘 때 귓전에서 왱왱거리는 모기 때문에 약이 올라 있는 통에 다른 잡것들의 도발은 내 안에 저 깊숙이 묻어둔 살인본능을 세차게 깨워낸다.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걸 알텐데도 녀석들은 내 손바닥 사이를 참 스릴 있게 잘도 빠져 나간다. 어쩌면 그들의 레이다망에 포착된 내 운동신경이 면밀히 간파된 건지도.

과도하게 친절한 남자, 그가 바란 것은?

도중에 속도계 배터리가 스르르 갑자기 꺼졌다. 수명이 다한 것이다. 지금까지 기록이 죄다 지워지는 허탈한 순간이다. 하지만 기록을 따로 정리해 왔기에 다행히도 누적거리는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 풀숲으로 도망 들어가는 도마뱀 보는 것이 특별한 일일 정도로 별 일 없이 2번 도로만 계속 따라간다. 오후 5시 경 상산 루이스에 도착.


일단 자전거 샾에서 속도계에 끼워 넣을 수은 전지를 구입할 요량에 자전거를 타는 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는 다행히도 영어를 할 줄 안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자전거 샾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자전거 샾? 물론이지. 나를 따라오라구. 바로 근방이야."


그는 자신이 인도하겠다며 친절히 자전거 샾까지 안내해 준다. 낯선 이방인의 자태가 기이한지 이리저리 동물원 원숭이 보듯 사람들이 애마 로페카(Ropeca, 히브리어로 '위로하는 자')와 내 몸 구석구석을 훑어본다. 여행에 관한 틀에 박힌 대화가 오고간 후 수은 전지가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자전거 샾에는 없었고, 길 모퉁이를 돌아 전자상가에 가면 있다고 일러준다.

"전자상가에 있는 거야? 그렇군. 이 봐, 내가 거길 알아. 날 따라와."

남자는 다시 한 번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정황상 충분히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음에도 너무 친절하다 싶을 정도의 과도한 배려였지만 그렇다고 앙칼지게 거절할 분위기는 또 아니었다.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달뜬 표정으로 내 편의를 봐 주었다. 남자의 통역 덕분에 어렵잖게 속도계 수은 전지를 구입해 수리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조금 때늦은 질문이다. 우린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얼마 간을 같이 있었던 것이다.

"호세(Jose)."

짧게 답한 그는 내가 눈웃음을 건네자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있잖아."
"네?"
"음, 나…."

남자는 살짝 뜸을 들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일까? 설마 여행자에게 무리한 부탁이나 요구를 하려나? 시원하게 말을 건네지 못하는 호세의 시선은 내 눈동자를 약간 비켜나 있었다.

"괜찮아요, 말해 봐요."

그에게 편하게 대해주자 그가 이윽고 말문을 이어갔다.

"저기 나, 콜라가 마시고 싶은데…. 콜라 좀 사 줄 수 있어?"
"콜라요? 푸하하."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살짝 긴장한 채 무슨 얘기가 나올까 그의 검고 탁탁한 입술을 주시하고 있는데 기껏 콜라 사 주라는 아이같은 요구라니.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물론이죠."

그의 도움에는 이미 콜라 한 캔 이상의 가치가 함의되었기에 난 기분 좋게 그를 데리고 약국으로 가서 시원한 콜라 한 캔을 사 주었다.

"고마워."

쉰, 아니 외국인 나이를 외관만 가지고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기에 아무리 젊어도 마흔 줄은 되어보이는 어른이 천진난만하게 콜라를 바라고 또 마시는 모습이 귀여운 게 나도 연신 유쾌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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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외관만 세워놓고 폐허로 변해버린 건물. 도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 문종성


지독한 노숙 생활, 처음으로 잠자리 알아보는데….

밤이 내렸다. 그와 헤어진 후 이제는 숙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 중에 처음으로 돈을 내고 잠자리를 구하겠다는 생각이다. 지독한 노숙모드와 5불 생활자 버전으로 여행 시작한 지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숙박비를 계산해 본 적이 없으니 내가 봐도 난 참 난감한 노마드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직 멕시코에 완벽한 적응이 덜 되었고, 사막 도시라 텐트치기도 그래서 편히 쉬고 싶었다.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230페소라고 광고하는 호텔이 보였다.

'230페소(약 2만원)면 가만 있자. 타코가 스물세 개니 최소한 이삼일 치 식사비에 해당하네. 내가 좋아하는 콜라 600ml짜리를 스물세 개 살 수 있는 거잖아. 지금껏 하루 5불로 살아왔으니 간단히 계산해도 하룻밤 사이에 4일치 경비를 쓴다?'

생각이 정리되었다. 장기 여행자의 짠돌이 근성이 어디 가겠는가. 호텔을 냉연히 지나쳤다. 외곽쪽으로 나가보면 조금이라도 더 싸지 않을까 계산한 것이다. 오렌지 빛 가로등이 더욱 선명하게 길을 비추는 밤의 깊이가 더해간다. 얼마 후 외곽에 있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에서 다시 기웃거렸다. 역시나 같은 가격. 대신 꽤 괜찮은 조건의 부대시설이다. 하지만 100페소대의 숙소를 찾아보겠다는 신념은 이미 고집으로 변해 있었다.

'쳇! 그 정도로는 날 만족시켜줄 순 없어.'

또 지나쳤다. 몇 군데 숙박 시설을 더 둘러보았지만 그 때마다 내 머리는 좌우로 도리질을 해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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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공사 중단으로 인해 흉물스러운 자취로 남겨진 다리 구조물들이 적지 않다. ⓒ 문종성


저녁 6시에 숙소를 찾기 시작해서 벌써 8시가 다 되어갔다.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어가며 숙소 구하는 데 조금씩 지쳐갈 무렵 타이어에 그만 펑크가 나 버렸다. 어둠 속에서 도로에 깔려 있던 날카로운 핀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밤도 깊었겠다 지쳐 있어서 수리할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자전거를 민 채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데 이번엔 설상가상으로 자전거가 도로의 홈에 빠지는 바람에 핸들을 놓치면서 핸들바 가방의 랙(고리) 부분이 깨져 버렸다. 기타가 조금 망가진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핸들바 가방은 비싸게 주고 구입한 거라 속이 쓰려왔다. '몇 푼 아끼려 괜히 무리한 건 아닌가' 후회가 들 때 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근처 조금 허름해 보이는 모텔에 기어 들어가다시피 했다.

지금까지 본 숙소 중 허름한 외관이기에 조금 더 싸지 않을까 했는데 웬 걸. 가격은 오히려 250페소다. 극심한 피로는 날카로운 판단력을 무뎌지게 한다. 앞뒤 안 보고 값을 지불했다. 처음으로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얇은 지갑을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 돈을 지불하고 방을 배정받는데 방 열쇠가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배시시 웃어보이며 유일하게 열쇠 없는 방을 제공해 준 것이다.

"다른 방으로 바꿔주세요."

참으로 상냥하게 심술궂은 주인

지친 표정으로 다른 방 배정을 요구했지만 걱정 말라며 그냥 그 방 쓰라고 한다.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도 않고, 기분 상하지 않기 위해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왔다.

어쨌든 자리를 잡아 들어오니 보기에도 허름한데 내부까지 좁아 한 번 놀랐다. 게다가 씻으려고 보니 물이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야심한 이 추운 밤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 소위 '막장테크'다.

일단 씻는 것을 유보하고 저녁을 굶어서인지 배가 고파 오렌지 4개와 고구마 2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포만감에 이르러 침대에 두어 시간 눈부터 붙였다. 찌뿌둥함에 새벽 1시에 일어났다. 그래도 샤워는 해야 했기에 할 수 없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찬 물에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하니 40여 분이 흐른다.

그런데 이것 참 황당하다. 그때서야 물이 미지근해지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40여분 후에 미지근해지는 물이란 말이다! 참, 전기코드에 코드조차 제대로 꽂지 못하는 건 애교 수준이라는 걸 말해 주고 싶다.

아무리 사막도시라지만 이 정도면 정말 너무 하지 않는가. 환불을 요구하고 다른 숙소를 찾으러 당차게 나가기엔 너무 늦어버려 울며 겨자먹기로 무거운 눈꺼풀을 다독여야 했다. 도무지 250페소의 값어치를 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시설도, 서비스도. 굳이 억지로 찾으라면 감사하는 마음을 훈련시킨다는 거 정도? 몸은 피곤하고 마음도 더 지친다. 그저 모든 걸 피곤함에 묻혀버리고 싶었다.

다음 날 햇살이 창 틈으로 스며 들어오고 피곤에 절은 눈을 힘겹게 떴다. 잠시 멍해진 머리를 흔들어 깨우다 갈증이 생겨 물을 마시려 했는데 숙소 내부엔 생수 한 병조차 없었다. 쩝,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며 물 한 모금 마셔볼까 사무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갔다.

"목마르면 콜라 사 먹어요."

웃고 있는 아주머니는 참 상냥하게 심술궂었다. 어이가 없어서 싱거운 미소를 짓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마실 물조차 주지 않다니. 더욱이 머리를 감으려고 보니 수도에서 어젯밤의 반도 안 되는 물이 처마 빗물 떨어지듯 나온다. 완전 기분 망쳤다. 오, 말도 안 되는 최악의 숙소. 내 다시는 피같은 돈 내고 이런 삼류숙소에 머물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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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멕시코에는 여관급 호텔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최소한의 숙박시설을 갖춰놓지 않고 영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가격은 천차만별. ⓒ 문종성


피곤을 풀어야 할 숙소에서 피로만 더 쌓인 채 도로로 나왔다. 햇살의 따가움은 그렇잖아도 마음 상한 얼굴의 표정을 더 일그러뜨렸다. 같잖은 여행자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병필승(哀兵必勝)의 자세로 다시 노숙모드 전환을 선언한다.

어쨌든 최악의 산 루이스 숙소로 인해 당분간은 어떤 환경에서 잠을 자든지 위로는 될 것 같다. 스물 다섯 개의 타코와 스물 다섯 병의 콜라가 머리 주위를 빠르게 공전하는 것만 빼면 생각 외로 몸상태는 괜찮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 #문종성 #자전거 #멕시코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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