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문제가 논의된 장소인 경복궁 경회루.
문화재청 문화재정보센터
하지만, 그것으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경복궁 경회루 아래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운하문제가 재차 거론되었다.
“숭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서 선박을 통과하게 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모래땅이라서 물이 항상 차지 못할까 의심스럽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自崇禮門至龍山江開渠, 以通舟楫, 則誠幸矣. 但疑沙地, 水不常滿耳. 卿等以爲如何.)전날에 이어 이번에도 태종은 지리적 이유를 들어 소극적 입장을 펼쳤다. 국왕이 이처럼 소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태종의 하문에 대해 대부분의 대신들이 “가(可)합니다”라고 답변했다. 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좌정승 하륜이 대신들을 상대로 사전작업을 단단히 해놓은 모양이다.
이때 유일하게 태종 편을 든 인물은 의정부 찬성사인 유양이었다.
“용산강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인데 어찌 백성들을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지리적 조건을 들어 운하를 반대하는 태종의 주장이 대신들에게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백성들의 반발을 시사하면서 반대론을 편 것이다.
그러자 지의정부사 박자청이 유양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선다.
“1만 명을 동원하면 1개월 안에 일을 끝낼 수 있으니,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1개월 안에 일을 끝낼 수 있으므로 백성들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태종은 결국 유양의 논리를 채택했다. 운하를 건설하면 지방의 조세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송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태종실록>에서는 “상께서 인력 동원의 어려움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안이 멈추었으며 실시되지 못했다”(深知用力之難, 故事寢不擧)고 전하고 있다. 아직 민심을 확보하지 못한 국초의 조선으로서는 그 같은 대규모 공사를 실시하는 게 무리였던 것이다.
위의 사례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건설공사의 성패가 피치자인 백성들의 호응 여부에 달려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엄청난 인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역(工役)은 몇몇 위정자들이 하고 싶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철권 통치자 이방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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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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