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김처선 역의 주민수와 소녀 윤소화 역의 박보영
SBS
어떤 이유에서 거세했건 간에, 궁궐에 함께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이 연모의 정을 나누었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김처선과 윤씨의 나이차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이 둘째 쟁점이다.
물론 국경도 초월하는 사랑이, 연령이라고 초월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그렇다 해도 나이차는 남녀관계에서 주요 조건 중 하나다. 김처선과 중전 윤씨는 몇 살 차이였을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김처선(1505년 사망)과 윤씨의 출생연도(1482년 사망)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보다 많은 자료를 살펴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실록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황자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나이차를 추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문종 재위기(1450~1452년)에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할 정도였다면, 김처선이 1430년대나 그 이전에 출생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한편, 1476년에 연산군을 낳은 윤씨는 145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종이 1457년 태생이므로 윤씨는 1450년대 혹은 1460년대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사람은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나게 된다. 나이차가 그보다 컸거나 작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중간치를 고려한 것이다.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나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일반적 상식으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신체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젊은 중전의 마음을 끌 수 있으려면 적어도 젊음이라는 조건은 갖추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이차가 크다 해도 김처선이 대담하게 중전 윤씨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별다른 매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 번 찍어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성종 시기에 그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이 셋째 쟁점이다.
2월 16일자 기사인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조 집권기까지만 해도 김처선은 툭 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고문관' 내시였다. 그런데 <왕과 나>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성종 시대에 들어서면서 김처선은 왕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왕명을 잘 전달하고 대비의 병을 낫게 하는 등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처선이 이처럼 성종대에 왕실의 신임을 받았다면, 그가 성종의 부인인 중전 윤씨와 연모의 정을 나누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왕과 나>에서처럼 그들이 '소문난 연인'이었다면, 김처선은 성종보다도 훨씬 먼저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왕과 나>에서 그가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은덕'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료상으로는 김처선과 중전 윤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두 사람의 접촉 여부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애정관계를 추정케 할 만한 접촉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넷째 쟁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