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와 보내는 사람

[역사소설 소현세자 7]떠날 때는 부드럽게 '벌처럼 쏘고 나비처럼 날아라'

등록 2008.02.23 13:40수정 2008.02.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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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현판. 항복한 인조가 기거했던 곳이며 창경궁에 있다. ⓒ 이정근



항복 첫날밤을 양화당에서 보낸 인조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게 아니었는데 기가 막혔다.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낼 때만 해도 이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국책으로 삼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는데 자신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창경궁의 아침이 밝았다. 궁정은 고요했다. 나인들의 발걸음도 없었다. 적막을 깨고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궁궐에서의 말발굽소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화당 앞에 한 무리의 기병대가 멈췄다. 말들의 콧구멍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들어온 대장이 말에서 내렸다. 화들짝 놀란 승지가 뛰어 나갔다.

“황제 앞에 문안드리는 것이 어찌 이렇게 늦는가?”
용골대가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예, 예.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영의정 김류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홍타이지는 뚝섬 군영에 있었다.

조선에는 조선왕이 없소이다. 고려왕이 있을 뿐이다

“고려왕을 알현하러 왔다.”
조선 땅에 와서 고려왕이라니 승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뭘 이렇게 꾸물거리느냐? 너희 왕에게 고하라.”
마부대의 목소리가 궁정을 울렸다. 인조를 알현한 용골대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밀었다.

“황제께서 내리신 왕인이오.”

고려왕인(高麗王印)이었다. 명나라에서 내린 조선왕을 폐하고 고려왕으로 봉한다는 뜻이다. 인조가 예를 갖춰 사례했다. 천자의 나라 명나라에서 내려준 고명을 회수하고 오랑캐의 왕인이라니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삼배구고두를 행하며 ‘군신맹약’을 한 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몽고 사람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합니다.”
“알았습니다, 즉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용골대는 자신의 무관에게 한성 점령군의 도성 출입을 금하라 지시했다. 서대문과 동대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몽고족 군졸들은 수시로 도성에 드나들며 닥치는데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용골대는 진달에게 휘하 군졸들을 풀어 4대문을 직접 지키도록 했다.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나와서 전송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동교에 나가도록 하지요.”

“일찍이 나와서 대기하도록 하시오.”
“네, 그리 하도록 하지요.”

“인평대군과 부인은 도성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고맙소, 귀국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은데 놓아줄 수 없나요?”

“포로들은 황제께서 직접 처분하실 것입니다.”
“세공(歲貢)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선처를 바랍니다.”

“귀국의 형세를 황제께서 직접 보셨으니 의당 재명년부터 시행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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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곶교. 도성 외곽에서 가장 오래된 살곶이다리는 홍타이지 환송식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이정근



뚝방에서 하염없이 대기하는 한심스러운 임금님

이튿날, 인조는 새벽에 창경궁을 나섰다. 도승지 이경직 한 사람이 배행했다. 삼전도에 붙잡혀 있는 소현세자는 호종 할 수 없었다. 전곶에 이르니 아침 해가 아차산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일출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 할아버지 태종대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던 자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환송식이 시작되었다. 군졸들이 창을 하늘높이 치켜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만주족 특유의 함성이 독도 들을 진동했다. 높은 언덕에 앉아있던 홍타이지가 인조를 발견하고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했다.

“짐은 특별히 고려왕에게 은전을 베푸노라. 고려백성 1천6백 명을 석방하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선전관을 평양에 보내 홍익한을 붙잡아 폐하 가시는 길에 압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조는 머리를 조아리며 화답했다. 홍익한을 묶어 헌상하겠다는 것이다. 홍익한은 삼학사의 한 사람이다. 청나라가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여 나라의 명분을 세우자’고 주장했던 강경파다. 이 때 인조는 ‘나라를 위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며 사헌부 장령 홍익한을 격려했다. 이것이 바로 항복한 군주의 정치놀음이다.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청나라가 쳐들어오기 10개월 전. 홍익한은 상소를 올렸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보내소서. 만일 신의 말이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인조실록>

환송식을 끝낸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별도로 불렀다.

“군사들을 수습하여 차질 없이 철군하도록 하라.”
“네.”

“철군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원성을 사지 않도록 하라.”
“네.”

“왕세자를 심양으로 데려 오는데 있어서 각별히 예우하도록 하라.”
“넵. 받들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 낸 이상 쓸데없는 행동으로 백성들의 적개심을 부추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포심을 심어 주는 것도 하나의 심리전술이다. 치고 들어갈 때는 악귀처럼 잔인하게 치고 들어가고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자비를 보여 주라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다. 홍타이지는 정복자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의 목표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조선의 불행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할 당시, 조선을 점령하고 군사를 주둔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 땅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조선을 그들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침공은 최후의 수순이었고 침략은 수단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나라였다. 조선 엘리트 중에 궁극적인 청나라의 목표를 아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조선의 불행이었다.

도르곤에게 지시를 마친 홍타이지는 동묘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군대만 넘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넘어갔다.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도성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왔다. 끌려가는 대열에서 피붙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꽁꽁 묶인 손목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청군들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이 때 부터 이름 없는 공동묘지 고개를 되넘이 고개라 불렀다. 한자로 적유현(狄踰峴)이라 표기했다. 되놈(胡人)이 넘었다는 뜻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와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적유현(狄踰峴)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성들의 원한과 저주가 서린 고개다. 이러한 고개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북으로 철수 하던 중공군들이 또 우리나라 백성들을 끌고 넘어갔으니 미아리고개는 우리와 기이한 인연이 있는 고개다.

미아리 고개를 넘은 홍타이지가 양주를 지나 익담령(益潭嶺)을 넘어 임진강을 건넜다. 철수명령을 받은 도르곤의 본격적인 철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삼전도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과 포로들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가 없다. 남한산성으로 진공할 때는 강이 얼어붙어 걸어서 건넜다. 이제 입춘도 지나고 날이 풀렸다. 배가 필요한데 배가 없다.
#전곶교 #미아리고개 #창경궁 #홍타이지 #도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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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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