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역 한인수
MBC
1720년생. 1743년(24세) 문과 급제. 호는 번암·번옹. 승문원권지부정자·예문관사관·충청도암행어사·동부승지·대사간·도승지·병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세손우빈객 역임. 정조 즉위 당시(57세)에는 호조판서.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채제공의 이미지는 충직하고 신중하며 과묵하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충직성 외에 과감성·강성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는 영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1758년 영조가 세자 폐위의 비망기(왕이 승지에게 내린 명령문서)를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킨 인물이 바로 채제공이었다.
이 일을 두고 훗날 영조는 손자 이산에게 "그는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라고 '강추'했다고 한다. 영조가 그에게 세손우빈객(세손에게 강의하는 직책)을 맡긴 것도 그에 대한 강력한 신임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제공에게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걸쳐 일관된 충성을 바쳤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히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 정도가 아니라 '대·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정조 즉위 이후에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했다. 정조 즉위 16일 뒤인 1776년 5월 13일 형조판서에 임명된 채제공은 그때부터 사도세자를 위한 복수에 착수한다. 사도세자의 죽음 문제를 다루면서 그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그러나 1780년에 홍국영의 세도가 붕괴하고 서명선 내각이 성립하자, 홍국영과의 친분뿐만 아니라 사도세자 재평가 작업에서 드러낸 과격성이 문제가 되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이후 8년간이나 한성 근교에서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홍국영과 함께 그도 물러난 것이다. 물론 1788년에 정계로 복귀하긴 했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과격한 충성심'은 그 자신에게 반대파의 공격이 집중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과감한 지원으로 정조 시대 열었는데...지금까지 정조 즉위를 계기로 '뜨는 별'이 된 세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과감성이다. 세력가 홍인한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과감히 세손을 지원함으로써 정조 시대를 여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3인의 운명은 정조 즉위 이후에 엇갈렸다. 홍국영은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중도하차한 데 반해, 서명선은 큰 우여곡절 없이 정조를 보좌했고, 한편 채제공은 정조 시대에 권세를 유지하긴 했지만 과격성 때문에 8년씩이나 정계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여기서 홍국영과 채제공이 '아주 영원히' 혹은 '한때나마' 권력에서 밀려난 것은 그 두 사람이 중용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제공은 결국 돌아왔고 홍국영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홍국영은 개인적 욕심 때문에 중용을 잃은 데에 비해 채제공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중용을 잃고 말았다. 똑같이 중용을 잃었지만, 그 원인은 달랐다. 정조가 홍국영은 죽도록 내버려두고 채제공은 8년 뒤에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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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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