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끓는 25살 젊은이는 한배를 탔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8] 소현세자와 도르곤의 운명적인 만남

등록 2008.02.25 10:09수정 2008.02.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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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나루터. 소현세자가 건넜던 송파나루터는 한강 치수사업으로 호수가 되었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석촌 호수에는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정자가 있다. ⓒ 이정근


삼전도에서 청나라군의 도하작전이 벌어졌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가 없다. 그렇다고 헤엄쳐서 건널 수도 없다. 한강 상류로 우회할 수도 없다. 길은 하나다. 배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배를 만들 기술자가 없다. 장인들은 용산강에서 병선을 만들기 위하여 징발해 갔다. 삼전 들녘에 진을 치고 있는 청나라 군사는 10여만 명에 이른다. 홍이포도 있다. 언제 이 많은 병력과 대포를 실어 나를 배를 만든단 말인가.

“뗏목을 만들어라.”


도르곤의 명이 떨어졌다. 청나라 군대는 수군이 없다. 때문에 병선도 없고 병선 건조 기술이 없다. 하지만 훈허나 요하를 건너며 전투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뗏목 이용술은 높았다. 조선인 포로 장정들을 청평과 가평에 보내 나무를 벌목하여 하류로 떠내려 보내게 했다. 오대산과 태백산에 들어가면 실한 나무가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귀로에 가도를 공격하는 황제군과 구련성에서 합류하여 심양에 개선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송파 일대의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외양간과 뒷간도 헐었다. 청나라 군사들이 지나간 마을은 온전하게 살아남은 집이 없었다. 송파를 싹쓸이 한 청나라 군사들이 벽동말로 진출했다. 온 동네 골목마다 집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당말은 물론 능골까지 자욱한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청나라 군사들의 뗏목용 목재 보투로 오늘날 송파와 천호동 일대가 초토화 되었다.

산성의 공기는 살벌했다, 무신들의 흥분에 문신들은 떨었다

창경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제도(諸道)의 군사를 파(罷)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라 명했다. 군대해산명령이다. 산성에서 명을 받은 사영대장 신경진이 길길이 뛰었다.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이 나라는 문관들이 말아먹었다.”


참찬 정기업이 가세했다. 참찬은 의정부 찬성사 문신이다. 산성의 공기가 문신을 향하여 폭발직전에 이르자 무신에 붙은 것이다. 이 때 청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혀간 처자를 찾아보겠다고 살며시 성을 나간 교리 남노성이 청군에게 붙잡혀 돌아오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흥분한 총융사 구굉(具宏)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큰소리를 쳤다.

“윤황(尹煌)이 늘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서라도 쳐서 물리치겠다’하였는데, 여덟 아들이 어디 있는가? 화친을 배척하기를 주창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만일 윤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 <연려실기술>


산성의 공기는 험악했다. 결과를 놓고 무인들끼리도 반목을 일으키고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무인들의 문인들에 대한 원망은 살벌했다. 성안에 갇혀 있던 문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전전긍긍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숭례문이 불타 무너져 내렸는데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이 서로 책임 떠넘기는 모습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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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남한산성. 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추위에 손발이 얼어 터지고 동사자가 속출했다. 연려실기술에는 100여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정근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하산했다. 옷은 남루하고 눈구멍은 휑했다.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자신들의 죄인 양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들이 돌팔매를 던지고 주먹으로 쳤다. 군사들은 대항 없이 그냥 맞았다. 전 참의 이상급은 청군에게 매를 맞고 옷을 빼앗겨 이날 밤에 얼어 죽었다. - <병자록>

“세자를 먼저 모시겠습니다.”

소현세자 군막을 찾아온 용골대가 채비를 독촉했다. 철군작전에 돌입한 청군은 포로들을 동원하여 뗏목을 만드는 한편, 부서진 배를 긴급 수리하여 지휘부가 이동하고 있었다. 군막을 나섰다. 군영에서 나루터에 이르는 길가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목이 잘린 주검. 배가 터진 시체. 새까맣게 불에 그을린 시신. 전쟁의 참혹함을 처음 목격한 소현은 경악했다. 이 정도의 참상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참경이었다.

삼전도에 도착했다. 황량하기만 하던 나루터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군막에 가두어 두었던 포로들을 끌어내어 뗏목을 만들고 있었다. 날은 풀렸지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포로들이 조금만 꾸물거려도 가차 없이 청군들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삼전도에서 배를 탔다. 부서진 배를 수리한 병선이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른다. 그들이 끌고 가는 대로 가야 한다. 강가에는 얼음에 묻혀 있던 아이들의 시신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그래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공허한 목소리는 진눈개비에 흩날리고 뱃전에 부서졌다

나루터를 벗어난 배가 한강 물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배가 강심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남한산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만감이 교차했다. 산성에 갇혀 보냈던 45일간이 꿈만 같았다. 급류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교리 윤집이었다.

“오늘날의 일은 모두 최명길의 죄입니다.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여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불러들였습니다. 그가 지은 문서에 대해서는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 <인조실록>

목소리는 컸지만 공허했다. 부왕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고 자신은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 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붙잡아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눈을 떴다. 배는 저자도(楮子島)를 지나고 있었다. 독도나루터를 지나친 것으로 보아 더 하류로 내려갈 모양이다. 도착지가 어디인지 모른다. 배가 가는 대로 가야 한다. 불어오는 강바람이 싸늘하다. 진눈개비가 흩날렸다. 고개를 들었다.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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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한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삼각산. 끌려가던 소현세자도 이 지점에서 삼각산을 보았을 것이다. ⓒ 이정근


산성을 지키던 이름 없는 백성들이여(名無山城守臣民)
목숨 바쳐 싸웠던 군졸들의 주검이여(命戰無退孤魂林)
찬바람 속 진눈개비는 시간을 가른다(江外雹散變古今)
기약 없는 볼모로 끌려가는 내 마음 (幾年俘客嘗膽心)
주척화의 외침은 돌이킬 수 없는 일 (盡厭主斥不能反)
이국 하나라는 오랑캐의 거짓 속에서(兩邦一國胡言深)
온갖 주장 가라앉을 날이 돌아오겠지(後來衆論終息滅)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오?”

뒤를 돌아보았다. 도르곤이었다. 소현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청나라의 2인자 도르곤. 소현과 도르곤은 12년생 동갑이다. 피 끓는 25살 두 젊은이가 한 배를 탄 것이다. 허나, 한 사람은 끌려가는 사람. 한 사람은 끌고 가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대륙을 가슴에 품은 사람. 한 사람은 속박에서 풀려나기를 소망하는 사람. 목적과 방향이 다르다. 황제의 동생 도르곤과 소현세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소현은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또 다시 눈을 감았다. 굶어 죽은 말을 잡아 군사를 먹일 때 허겁지겁 달려들어 말고기를 뜯던 군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날. 광주 목사 허휘가 쌀떡 한 그릇을 바치니 백관에게 나누어 보내고 간장 하나에 수라를 드시던 부왕의 모습이 망막에 잡혔다. 수어사를 대동하고 초소를 순시할 때, 얼어 죽은 군졸의 시신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검고 푸르러 사람 형상 같지 않던 얼굴이었다.

“다 왔습니다. 내리십시오.”

살이 터지고 손가락이 빠져 참혹한 모습으로 얼어 죽어 있던 군졸의 환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소현세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을 떴다. 망원정이었다. 드넓은 상암벌을 끌어안고 있는 강기슭이었다. 소현세자를 실은 배는 한강을 흘러내려와 잠두산을 지나 조강 어귀에 멈춰 선 것이다.
#남한산성 #한강 #삼각산 #망원정 #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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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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