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 장면을 따라 떠나는 여행

[책으로 읽는 여행 21] 이동진의 영화풍경 <필름 속을 걷다>

등록 2008.03.07 09:15수정 2008.03.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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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필름 속을 걷다> ⓒ 예담


영화와 여행은 흔히 꿈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 둘이 만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하인리히가 머물렀던 티베트 라싸(<티벳에서의 7년>)의 짙푸른 하늘이 그대로 스크린이 되고, 라이 쿠더가 차를 몰았던 쿠바 해변도로 말레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파도 소리는 배경 음악이 된다.


책 <필름 속을 걷다>는 '이동진의 세계 영화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수정한 책이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운아던가! 저자는 자신이 맛보았던 이런 기쁨들을 멋진 사진과 글로 표현하면서 세상의 모든 영화와 여행 마니아들에게 부러움을 선사한다.

<러브레터> 배경 마을 오타루, 인기척 내봤자 내다보는 이 없고...

책 맨 처음에 소개하는 영화 속 장소는 바로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 되었던 오타루다. 일부러 영화의 시간 배경과 같은 겨울에 이곳을 찾아가니 쌓인 눈 때문에 엉금엉금 기어서 가야 할 정도로 엄청나다. 자동차 운행도 어렵고 눈 속에 갇힌 것만 같은 이 마을에 영화의 여주인공인 후지이 이츠키가 살던 집이 있다.

주소만 들고 제니바코 역 앞에서 무작정 택시를 탔건만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택시기사는 방향도 제대로 못 잡은 채 끝없이 헤맨다. 간신히 집 근처에 도착했지만 쌓인 눈으로 차가 집 앞까지 갈 수 없어 겨우 걸어 이 집에 도착한 저자. 언덕 아래 골목 끝에 있는 집은 초인종 누르는 곳을 제외하고 입구 기둥 전체가 눈더미에 묻혀 있을 정도다.


찾아가서 아무리 인기척을 내봤자 내다보는 사람도 없고 저자는 혼자 쓸쓸히 눈길을 내려온다. <러브레터>라는 영화는 이 눈쌓인 고적함이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멋없는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쌓인 눈과 그 설산에 파묻힌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 영화만큼 오타루의 풍경 또한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장면 하나 하나에서 시카고를 감상할 수 있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한 도시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손꼽을 만한 영화로 어떤 것이 있을까? 시 전체를 초토화시킨 1871년 대화재 이후 철저한 도시 설계로 세운 미국의 시카고는 각양각색의 초고층 빌딩이 즐비해 건축가들의 솜씨 자랑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이 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시카고를 감상할 수 있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아마도 시카고를 가장 예쁘게 찍은 영화일 것이다. <왓 위민 원트>와 <레이크 하우스>를 비롯해 시카고에서 찍은 수많은 사랑 영화 중에서도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로맨틱한 도시적 감성은 단연 돋보인다. (중략)

같은 도시라도 어떤 영화를 테마로 잡느냐에 따라서 여행의 색깔은 완전히 달라졌다. 만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뮤지컬 <시카고>나 알 카포네를 주인공을 삼은 갱 영화를 테마로 잡았다면 여정의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 대한 인상은 그 도시에 대한 느낌을 좌우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뉴욕의 가을>에 나오는 센트럴 파크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반해 뉴욕을 찾기도 하며, <러브 액추얼리>에 등장하는 예쁜 영국의 모습에 런던 여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고는 영화에 등장하는 말도 안 되는 러브 스토리에 빠져들어 자기도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어 보는 환상도 꿈꾼다.

때로는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기도

영화와 여행이 주는 공통점이 바로 이처럼 우리를 꿈꾸게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영화관을 찾고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답답한 현실 세계를 잊은 채 새로운 활력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영화가 무조건 꿈과 환상만을 심어주는 건 아니다. <쉰들러 리스트>처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직시가 필요한 영화도 있다.

비극의 도시는 고요했다. <쉰들러 리스트>의 자취를 좇아 폴란드의 천년고도 크라쿠프를 훑는 여행은 매순간 안개처럼 곳곳에 서린 슬픔을 촉감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중세 도시의 위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크라쿠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의 여진 속에서 무심한 세월의 힘을 빌려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거리마다 무거운 역사가 문신처럼 압착되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냉소적이면서 고독감이 풍기는 저자의 문체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되었고 실제 잔인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던 크라쿠프를 찾으면서 더더욱 암울함에 빠진다. 영화의 진행 순서 그대로, 참극의 전조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해 맨 마지막으로 집단 수용소의 학살 현장을 방문하는 여정은 추운 이곳의 날씨만큼이나 매서운 인간사의 비극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 대한 환상으로 티베트를 찾은 저자는 자전거 택시 운전사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보고는 '아니 티베트에서도!'하며 놀란다. 그러고나서는 티베트에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토록 갈망하던 이곳에 가서 고산병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제대로 돌아다녀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와야만 했던 안타까움. 이래서 세상은 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나 보다.

어쨌든 이 책에 나오는 여행지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쉽게는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을 비롯하여 멀리 떨어진 쿠바까지, 여행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저자의 경로가 부럽기만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상한 여운이 든다. 마치 저자가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고 그의 여행 기록이 담긴 영화를 한 편 감상한 듯한 느낌. 책장을 넘기면서 독자 또한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저자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낀다면 더더욱 멋지지 않을까?

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지음,
예담, 2007


#여행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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