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기 전까지, 우리 아이 어쩌나요?"

[取중眞담] 저소득 방치아동 100만시대, 안양어린이 유괴살인사건으로부터 배운다

등록 2008.03.21 22:01수정 2008.03.2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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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 이혜진양의 자리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양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흰 국화와 편지가 쓸쓸히 놓여있다. ⓒ 남소연


"애들만 있는 집에는 안심하고 보낼 수 없다. 맞벌이가정 아이들은 학원에서도 싫어한다."

최근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맞벌이가정 아이들은 홀로 방치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산만해서 학습 분위기 조성이 안 돼 학원에서 꺼리고, 애들끼리만 있는 집에서는 쉽게 탈선행위가 벌어지기 때문에 엄마들이 안 보낸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듣다보면 맞벌이 부부들이 발끈할 수 있다. 요즘 맞벌이 아닌 가정이 얼마나 된다고, 맞벌이 부부가 죄냐고 볼멘소리가 쏟아질 터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1031만5000가구 가운데 363만3000가구가 맞벌이 가정이다. 한부모 가정과 단독세대를 빼고, 부부 취업가구를 기준으로 할 때 35.2%가 맞벌이 가구인 셈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고, 늘어나는 사교육비 부담 등 경제사정이 날로 어려워지면서 맞벌이가정은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맞벌이가정은 늘어나는데 아이들을 맡기거나 돌보는 사회시스템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방치되는 아동·청소년 숫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학교 끝나고 부모 퇴근할 때까지... 학원 말고는 없나

안양에서 끔찍하게 유괴돼 살해당한 혜진이와 예슬이도 맞벌이가정 아이들이었다. 혜진이와 예슬이가 다녔던 안양 명학초등학교 교감은 "부모와 학교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취약시간이 문제"라고 방치되는 아동보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신옥 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사는 "평균소득 가정은 그나마 '학원 뺑뺑이'라도 돌리면서 방치시간을 줄이지만 저소득가정의 경우에는 방과 후 방치되는 아이들이 많다"며 "범죄지역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저소득밀집지역에서 잦은 사고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 사회복지사에 따르면, 방치되는 아동·청소년들은 대개 하루종일 집에서 컴퓨터에 몰두하거나 학교 앞 오락실 혹은 PC방에서 지낸다고 한다. 보호자 없이 놀이터에서 놀면서 부모의 귀가를 기다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부 운이 좋은 아이들은 지역아동센터에 맡겨져 공부나 특별활동 지도를 받지만, 주변에 이 같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방치된다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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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친구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흐느끼고 있다. ⓒ 남소연

지난해 할머니와 지내던 조손가정의 아이가 혼자 있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방치된 아동들은 범죄와 위험에 늘 노출돼 있어 사회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 사회복지사는 "골목 안의 오락실에서 비행청소년 형들과 만나 도벽에 빠져 절도사건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대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비행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의 아동․청소년들은 동네에서 놀다가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는 "골목길에서 '보여달라'거나 '만져달라'는 등의 '성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어른이 없는 빈 집에서는 음란비디오를 보거나 집안에 있는 여자아이를 상대로 성폭행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걱정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아동복지 전공) 교수는 "저소득층 맞벌이가정의 경우에는 부모님의 근무시간이 불규칙해서 주중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어른의 보호 없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와 함께 저소득층 통합서비스 욕구조사를 해보면 가장 시급히 원하는 바가 방치아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교수는 "정부는 방과 후 방치아동 문제에 대해 등한시 해왔다"며 "그동안 지역아동센터를 늘리기는 했지만 규모나 프로그램 면에서 여전히 부실하다"고 비판했다.

지역아동센터 늘어났지만, 여전히 방치되는 아이들

실제 지역아동센터의 혜택을 받는 아동의 수는 매우 적다. 학교도 수업시간이 끝나면 시설을 폐쇄해 아이들이 적당히 머물 곳이 없는 실정이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아이돌봄이' 서비스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업내용에 대한 홍보부족으로 실제 사용자는 매우 적다는 것이다.

이봉주 교수는 "지역사회에 방치된 아동에 대한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한 실정"이라며 "사회적 아동케어시스템을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치아동의 사회서비스 확충을 위한 시스템 보완이 필요하다"며 "일정 소득 이상의 가정에서는 정부가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자부담할 용의도 큰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사회서비스의 핵심 대상은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 돼야 하겠지만, 최근 여성의 노동참여율과 친척체계가 무너진 핵가족시대에 맞는 '사회적 돌봄'이 일부 계층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서비스'로 확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아동돌봄이서비스는 질이 열악하고 신뢰감이 없으면 차라리 사교육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쉽다"며 "복지국가의 지름길은 제대로 된 아동·청소년 돌봄서비스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 교수는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아직도 가족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한국의 경제수준과 가족구조의 변화를 판단할 때 보호와 양육기능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시기가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건복지가족부 가족지원팀의 한 관계자는 "혼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긴급 출장을 가는 '일시적 돌봄이' 파견, 방과후 아동지원 등 여러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며 "전국 65개소에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설립해 지난해 한해동안 9만7000여건의 도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역아동센터와 청소년아카데미 등을 열면서 정부도 많은 서비스를 하고 있다"며 "100% 정부가 모든 지원을 할 수도 없고, 또 예산이 부족해 전부 지원할 수 없음을 이해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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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지 두 달여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혜진양의 유가족들이 17일 오전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 혜진양이 공부했던 교실을 찾아 빈 자리에 영정사진을 내려놓고 있다. ⓒ 남소연


"얼마나 더 죽어야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워줄까요"

전국에 방치되는 아동(0세~17세) 수는 최저소득 빈곤층 기준으로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차상위 계층까지 합하면 200만명이 된다. 평균소득 가구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차분하게 혜진이와 예슬이가 죽게 된 배경을 따져보자. 누군가로부터 두 아이가 보호받고 있었다면 잔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늘 사후약방문 격으로 제도를 손질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죽지 않도록' 정부가 사회서비스를 확충할 때다.

지난 20일 안양어린이유괴살인사건 취재를 마치고, 지하철 1호선 명학역 빵집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는 사이, 맞벌이가정의 엄마인 빵집주인은 기자에게 하소연을 늘어놨다.

"우리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요즘 계집애 테가 나고 예뻐져요. 그런데 저는 겁이 납니다. 저는 늘 밖에 나와 있고, 애는 홀로 있으니까 걱정이 돼죠. 그래서 '3명 이상 몰려다녀라, 엘리베이터 혼자 타지 말아라, 외진 길 다니지 말아라, 경비아저씨도 조심해라' 별별 얘기를 다 해요. 맞벌이 엄마들 다 같은 심정일 거예요. 정부는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실종되고 죽어야 안전하게 키워주는 시스템을 도입할까요?"
#안양어린이유괴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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