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하나 이어온 것만도 다행이었어요"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51] 임실 전해산 의병장①

등록 2008.05.02 19:45수정 2008.05.0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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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자무식꾼이오

"목숨 하나 이어온 것만도 다행이었어요."

a  전해산 의병장 아들 전진규씨

전해산 의병장 아들 전진규씨 ⓒ 박도


그리고는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구한말 호남의병장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의 수괴 중 하나'라고 일제가 그들의 전투일지인 <전남폭도사>에 밝힌 바 있는, 전해산 의병장의 아들 전진규(89)씨가 나에게 말한 첫 마디였다. 더 이상 무슨 얘기가 필요하랴.

전해산 의병장 후손을 취재하고자 지난해 섣달부터 평소 안면이 있는 손자 전영복씨에게 연락하였다. 하지만 그 무렵 전영복씨가 서울 여의도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하다가 광주광역시 국회협력관으로 발령이 나 광주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업무 파악으로 매우 바쁘다면서 한 달 정도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 한 달이 두세 달 지났다. 마침 전해산 의병장 출신 지역도 전북인 데다가 일제조차도 거물 수괴로 일컫는 바라 이 참 저 참 맨 뒤로 돌렸다.

4월 초 호남 의병 전적지 7차 답사 여정을 짜면서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전영복씨에게 지난 약속을 채근했다. 그러자 당신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는 듯, 4월 5일 남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신 아버님은 서울에서 사시기에 당신 아버지 대담은 그 전날인 4월 4일로 약속하였다.


마침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이 당신 할아버지(조경환 의병장)가 전해산 장군이 일제 토벌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출해준 전대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마침 당신 집과 멀지 않는 곳으로, 부인도 아버님 내외도 잘 안다고 동행을 자청하셨다.

전영복씨와 부인이 전화로 몇 차례나 댁에서 점심을 준비해 둘 테니 같이 진지를 들면서 이야기하자고 간청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는 오후 2시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지하철 5호선 종착역인 방화역 대합실에서 조세현 위원을 만나 미처 5분 거리도 안 되는 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초인종이 울리자 전해산 의병장 손자며느님 송화진(52)씨가 반겨 맞았다. 전진규씨는 누워계시다가 마나님 부축을 받아 일어나시고는 굳이 거실로 나와 쇼파에 앉았다. 노환으로 수전증이 있는 데다가 언어장애까지 겹쳐 곁에서 손자며느님 도움으로 몇 마디 대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배운 게 없어요. 국문(한글)도 못 깨친 무식꾼인데다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아버지(전해산 장군)는 돌아가셨고, 부모조차 모두 일찍 여의어서 부모 없는 아이로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어요."

평생을 머슴으로 소작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장가도 서른이 되도록 못 가 하는 수 없이 나이를 두 살 속여서 띠 동갑인 18세 처녀에게 갔다는 얘기에, 곁에 앉은 마나님은 "내가 속아서 시집갔다"고, 그때 신랑이 서른 살난 총각이면 가지 않았을 거라고, 6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억울해 했다.

"내가 일자무식꾼이라 큰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아들한테 물어보시오. 걔는 다 알고 있을 거요."

a  전해산 의병장 작전지도로 만든 병풍

전해산 의병장 작전지도로 만든 병풍 ⓒ 박도


전해산 의병장 병풍에 얽힌 사연

전해산 장군은 1910년 7월 18일 대구감옥소에서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의병장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당신이 순국하자 부인도 따라 극약을 마시고 자결하여, 쌍 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장군의 슬하에 아들이 없자 아우 기영의 둘째 아들 진규로 양자를 삼아 대를 이어오고 있다.

a  순천대학교 박물관 소장 전해산 <진중일기> 원본, 표지는 새로 만들었다.

순천대학교 박물관 소장 전해산 <진중일기> 원본, 표지는 새로 만들었다. ⓒ 박도


2005년 9월 30일, 나는 의병선양회원을 따라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 길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을 들렸을 때 소장된 진귀한 호남의병 유품들을 살려본 바가 있었다. 그때 전해산 의병장 작전도로 만든 병풍과 진중일기를 대하고는 눈물을 쏟는 전영복씨를 보고서 그 영문이 자못 궁금하였다.

그때 그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대하니 갑자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답했는데, 그 병풍과 진중일기에 얽힌 곡진한 사연이 있는 듯하였다. 어쩌면 이번 취재에는 그 사연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진규씨는 젊은 날 폭도 수괴의 아들로 배우지도 못하고 갖은 수모를 받으며 머슴으로, 소작인으로 살아왔으나 늘그막에는 자식을 잘 둔 덕분으로 요즘 세상에 드문 며느리의 봉양을 받는 모습을 보니까 내 마음이 흡족하고 며느님이 감동스럽게 보였다.

"어르신, 아들 며느님 잘 두셨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들 하나밖에 두지 못하였는데, 열 자식 부럽지 않소. 아들  며느리가 아주 잘 해요. 고맙고 고맙지요."

나와 조세현 위원은 세 가족의 인사를 뒤로 한 채 아파트 승강기에 올랐다. 왜 자식이 소중한지 그 까닭을 일깨워주는 만남이었다. 이튿날 이른 새벽 나는 남원으로 향했다.

a  전해산 의병장 후손(왼쪽부터 손자며느리 송화진, 며느리 양복례, 아들 전진규씨)

전해산 의병장 후손(왼쪽부터 손자며느리 송화진, 며느리 양복례, 아들 전진규씨) ⓒ 박도

#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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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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