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42]실리는 다원적인 요구에서 나온다

등록 2008.05.05 19:52수정 2008.05.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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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압록강.  강 건너가 북한 땅이다.

압록강. 강 건너가 북한 땅이다. ⓒ 이정근



최명길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했다. 임금이 보낸 어의와 함께 돌아온 것이다. 최명길은 한성으로 직행하지 않고 의주관에 머물며 장계를 올렸다.


“신은 주청(奏請)하는 글을 마음대로 고치고 또 세자를 돌려보낼 것을 경솔히 진주(陳奏)하여 힐책이 있게 하였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장계를 한성으로 보낸 최명길은 임금의 하명을 기다리는 동안 통군정에 올랐다. 통군정은 의주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 봉우리에 있다. 통군정에 오르면 압록강이 발아래 흐르고 만주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관서팔경중의 하나다. 

대죄하는 신하로서는 괴이한 행동이다. 최명길은 임금도 걱정하는 환자다. 사신으로 심양에 들어간 최명길이 병이 났다는 급보를 받은 임금이 어의를 파견했다. 하지만 최명길의 병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병이었다.

a 삼각산. 중국 단둥에서 바라본 삼각산. 앞에 보이는 것이 백마산이다.

삼각산. 중국 단둥에서 바라본 삼각산. 앞에 보이는 것이 백마산이다. ⓒ 이정근



통군정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압록색 물빛을 자랑하고 수많은 모래섬들이 조개껍질처럼 엎어져 있었다. 압록강 하구 쪽으로 용암포가 바라보이고 남쪽으로는 석숭산과 백마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백마산에 시선을 멈춘 최명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군사들은 왜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렸을까? 좋다. 침공군을 통과 시키고 후방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병법이라면 산성에 들어간 군사들이 왜 나오지 않았을까? 청나라 군대가 두려워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가 그토록 무서웠다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지 않은가?”

최명길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병서에 부전이굴(不戰而屈)이 상책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싸워 백번이기는 것(百戰百勝)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라고 손자가 모공편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백번 싸워 백번 패할 전쟁이라면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지 않은가. 혹자는 나의 이런 생각을 패배주의라고 비판하겠지만 패배주의하고는 그 성격이 다르다. 진정 패배주의는 청나라 군사를 맞아 싸워보지도 않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리고 적군이 도성에 가까이 오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 패배주의다. 청나라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것 같지만 패하지 않는 그런 묘책은 없었을까?”

통군정에서 내려오는 최명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병가의 패배는 있을 수 있는 일(兵家常事)이듯이 국가에도 흥망성쇠와 승패가 있는 법. 병서의 귀재 손자가 필승전략만 남기지 말고 패배했지만 패하지 않는 지략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의주관에 당도한 최명길에게 임금이 보낸 전지가 도착했다.

“경의 임무를 치하한다. 빨리 도성으로 돌아오도록 하라.”

a 양화당 편액.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은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거처하던 곳이다.

양화당 편액.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은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거처하던 곳이다. ⓒ 이정근



질책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칭찬이다. 최명길은 서둘러 의주를 출발했다. 한성으로 향하는 최명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성에 도착한 최명길은 창경궁으로 가 인조를 배알했다.

“경에게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였다. 경이 무사히 돌아오니 매우 기쁘다.”

“다시는 용안을 뵙지 못하고 먼저 죽을 번 하였습니다.”

“세자를 데려오지 못해 아쉽지만 백성들을 속환해 왔으니 경의 공이 크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협상에서 실리는 다원적인 요구와 추상적 전술에서 얻어진다

최명길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자 환국문제는 처음부터 무리라고 생각했다. 청나라가 조선의 세자를 볼모로 데려간 이상 그리 쉽사리 내어놓으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군대 파병 역시 그렇다. 명나라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지원군을 사양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방적인 요청이라 판단했다. 그렇지만 임금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주문을 고쳤다.

그러한 정세를 꿰뚫어보고 있는 최명길이 주문을 변조해가면서 까지 범문정과 담판을 벌인 것은 차선을 쟁취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협상에서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고민하던 최명길은 협상은 주고받는다는 것에 주목했다. 실리는 다원적인 요구와 추상적 전술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조선인 포로 780명을 아무 대가 없이 석방시켰다. 범문정은 현상을 유지했고 최명길은 포로를 얻었다. 결국 대륙의 여우 범문정이 승리한 것 같았지만 전리품은 최명길이 거머쥐었다.

“경이 보기에 저들의 정세가 어떠하던가?”

“큰아들이 불초하기 때문에 지난해 나은 자식으로 저사(儲嗣)를 삼을 뜻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 지방으로 향한다 하는데 이는 명나라를 치려는 것이 아닌가?”

“군사기밀이 매우 엄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군사가 강하고 싸움을 잘 하는데 특별히 강무하는 일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호인들은 10세가 되면 말 타기와 활쏘기와를 익혀 날마다 말을 타고 치달리며 사냥을 하니 이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쓰러지면 밟으려고 하는 것이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

“지난해부터 유언비어가 퍼져 모두들 왜구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왜국의 사신이 갑자기 7조목을 가지고 왔다하니 그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왜구가 우리나라로 쳐들어온다면 청나라도 위태로울 것이니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다.”

“신이 청나라 사신을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각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분분하다고 하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최명길이 심양에 있는 사이 일본 사신 평성연이 왔다. 그가 가져온 7조목은 ‘첫째, 교역하는 물화가 적다. 둘째, 조선 사신이 일본에 들어오면 상단에서 절하는데 일본에서 보낸 사신은 모래밭에서 절을 한다. 셋째, 해마다 쌀과 콩을 내려주는데 ‘사(賜)’자를 쓰지 말라. 넷째, ‘봉진가(封進價)’ 석 자도 써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선에서 보내는 서한에 대마도는 귀주라고 하라. 여섯째, 사선(使船)이 정박하는 곳을 돌로 쌓아 풍파를 면하게 하라. 일곱째, 돌로 쌓는 것이 쉽지 않으면 관사를 새로 지어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해마다 일본에 식량을 보냈다. 그 양을 더 많이 보내라는 것과 ‘내려준다’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보낸 사신을 홀대한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북방의 청나라에게 얻어터진 조선을 남방의 일본이 걸고넘어진 것이다. 쓰러지면 밟으려고 하는 것이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현재 우리의 독도를 일본이 다께시마 라고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듯이 대마도를 우리의 땅 대마도라 부르고 있는데 자신들의 고유 명칭 귀주(貴州)로 불러달라는 것이다.
#병자호란 #최명길 #백마산성 #임진왜란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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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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