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현손이 들려주는 '우리 민족의 혼'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56- 마지막회] 면암 최익현 선생 (2)

등록 2008.05.13 10:52수정 2008.05.1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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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충남 예산)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충남 예산) ⓒ 박도



기(氣)가 모아지면 살고, 기(氣)가 흩어지면 곧 죽는다

a  면암 현손 최창규 박사

면암 현손 최창규 박사 ⓒ 박도


"이 난세에 '의(義)'를 좇아 의병 전적지를 순례한다는 선생의 얘기를 전해 듣고 몹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올해 일흔 셋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현손 최창규(崔昌圭) 박사는 몇 해 전,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이후 거동이 불편하여 거실에서 의자에 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초면인데도 마치 오랜 동지라도 만난 듯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2008년 5월 6일 오후 4시,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을 따라 서울 도곡동 한 아파트로 찾아뵈었다. 일주일 남짓 요양을 위해 강원도에서 머물다가 오전에 도착하였다고 곁에서 시중드시는 부인 이현구(71) 여사께서 인사 겸 그간의 사정을 말씀하셨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신 탓인지 예삿날보다 말씀도 더 또렷하시고 기운도 차리신 것 같습니다."

나는 최 박사 바로 곁에 앉고는 준비해 간 녹음기를 켰다. 며칠 전 모덕사 경내에 있는 면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성충사에서 뵌 면암 선생의 예리한 눈빛을 최 박사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다.


"한국인 사상 뿌리가 되는 성리학에서 생사(生死)를 얘기할 때, '氣聚卽生(기취즉생)이요, 氣散卽死(기산즉사)'라고 한즉, '기가 모아지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곧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오히려 더 끓어오르는 듯, 오늘의 현실을 나라의 기(氣), 곧 기운이 흩어져 국론이 분열된 바, 매우 혼란스럽다고 진단한 뒤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인간의 실체는 삶과 죽음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의 연유는 우주인이기에 그 기(氣)가 한데 모아지면 생(生) 곧 삶이 오고, 그것이 흩어지면 사(死) 곧 죽음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氣)가 어떻게 하면 모아지고, 어떻게 하면 흩어지느냐? 그 답은 의(義)에 있습니다."

a  모덕사

모덕사 ⓒ 박도


"의(義)를 통해서만 기(氣)를 모을 수 있다"

a  최창규 박사 부부와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오른쪽)

최창규 박사 부부와 조세현 의병선양회 부회장(오른쪽) ⓒ 박도


최 박사는 "생명체뿐 아니라, 나라 인류 세계 우주도 삶과 죽음 곧 생사관(生死觀)이 있다"고 하시면서, "기(氣)가 모아지면 살고, 기(氣)가 흩어지면 죽음이 온다"는 이치는 생명체도  나라도 세계도  우주도 다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기(氣)는 반드시 의(義)를 통해서만 모아진다고 하시면서, 의(義)를 먼저 되찾아 기(氣)를 모으면 나라가 다시 융성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곰곰이 새겨들을수록 이 난국을 헤쳐 가는 답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의(義)를 통해서만 기(氣)를 모을 수 있다'는 이 말씀을 금과옥조로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여겨졌다. 구한말에도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나라가 파탄이 났는데, 일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악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무서운 일은 매관매직을 한 이들이 오히려 큰 소리치고, 그들을 일벌백계해야 할 지도자나 관리조차도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들 지도자나 관리조차도 지난 삶이 의롭지 못하고 부정부패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적을 물리치는데도 있었지만, 흩어진 대한 민족의 뜻을 한데 모으는데 본래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 박사는 '이이일(二而一)', 곧 '둘이면서 하나다'를 얘기하셨다. 우리나라 남북한이 상황에 의해서 잠시 서로 헤어져 있지만, 그 둘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원래 하나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마침내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야만 나라에 온전한 기(氣)가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 보셨다.

대유학자 후손답게 우리 겨레의 바탕 사상과 나아갈 길 등을 거침없이 말씀하시는데, 마치 일백년 전 면암 선생이 말씀하시는 듯, 말씀들이 난국을 치유할 수 있는 방책들로 위정자들이 귀담아 들었으면 쉽게 치세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였다.

"의(義)는 우리 민족의 혼입니다"

a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제자 최익현에게 준 글 '存心明理(존심명리)'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제자 최익현에게 준 글 '存心明理(존심명리)' ⓒ 최창규


마침 의자 옆 액자에는 '存心明理(존심명리)'라는 글이 담겨 있었는데, 이 글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이 제자 면암에게 준 친필 글로, "내 안에 있는 마음을 잘 보존해서 우주의 이치를 밝힌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품은 대부분 모덕사 대의관에 소장 중이지만, 유독 이 액자를 가까이 두고 그 가르침을 음미한다고 말씀하였다.

대담 내내 최 박사 곁에서 줄곧 시중을 드시는 부인에게 면암 종부로 살아온 얘기를 여쭸다.

"면암 집안이라고 해서…"

말을 꺼내려는데 최 박사가 눈을 부라렸다. 명문 집안이라 그래도 살림은 괜찮을 줄 알았다는 얘기를 꺼낼 참이었는데 그만 영감님의 추상같은 위엄에 입을 닫았다. 대쪽같은 선비 집안이 어찌 넉넉할 수 있으랴.

"우리 민족은 단군이 개국한 이래 계계승승 '의(義)'라는 보물이 있는데, 이를 잘 지키면 국운이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의(義)는 우리 민족의 혼입니다."

a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 청양군 모덕사


최 박사가 대담 내내 시종일관 '의(義)'를 말씀하시는 데는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의 정이 듬뿍 깃들어 있었다. 아쉬운 대담을 마치고는 사진 촬영 여부를 여쭙자 최 박사는 불편함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한 시간 남짓 대담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은사 조지훈 선생의 <봉황수(鳳凰愁)>가 떠오르며 내 마음이 아려왔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틀었다. ……

누가 세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산새와 비둘기의 둥주리를 모두 헐어낼 수 있으랴. 그것은 오직 이 나라 백성들만이 할 수 있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바로 이 나라 백성들이었다고 감히 답하면서 나의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를 마친다.

a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에 절을 올리는 필자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에 절을 올리는 필자 ⓒ 오용진


2007년 10월 24일 첫 기사를 송고한 이래, 2008년 5월 12일까지 모두 56회의 기사를 썼다.

모두 스물 한 분 선열 발자취를 더듬었다. 연재 기간 내도록 매우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행복했다.

매우 힘든 점은 내 학식과 필력이 부족한 때문이요, 무척 행복했던 일은 나라를 위해 지푸라기처럼 목숨을 바친 선열과 후손을 만나 뵈었기 때문이다.

이번 나의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가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의 계기를 마련해 주신 녹천 후손 고영준 선생, 자문역과 자료 제공을 흔쾌히 허락해 주신 순천대 홍영기 교수, 의병의 존재와 의미를 가르쳐주신 윤우 의병정신선양회장님, 길 안내를 자청해 주신 오용진 순국선열회부회장님, 조세현 의병정신선양회 부회장님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순례 길에 노잣돈을 보태주신 우당기념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님과 황영구 치과의원장님, 순례 길에 차를 대접해 주시고 밥을 사주신 여러 후손, 친절히 전적지를 안내해 주신 향토사학자와 길을 가르쳐주신 주민들에게도 깊이 고개 숙인다. 솔직히 이분들이 없었다면 감히 호남 의병 전적지를 순례할 수 없었다.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하는 동안 이름도 없이 산화한 숱한 의병들의 고귀한 넋에 늘 깊이 고개 숙이면서도 제대로 담지 못한 점이 못내 죄송스럽고, 미처 더듬지 못한 많은 선열님과 후손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이번 순례 길에 뼈저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가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었고, 이 땅의 숱한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켜온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훌륭한 조상을 둔 데 대해  큰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례 길인 예산의 면암의 묘소에서 나는 꿇어 조국의 안녕과 무궁함, 그리고 앞으로도 선열들께서 이 나라를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내 거친 글을 다듬어 준 오마이뉴스 측과 줄곧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마무리 말로 가늠한다.
#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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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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