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를 잘라도 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55] 면암 최익현 선생 (1)

등록 2008.05.11 18:29수정 2008.05.1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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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모덕사(慕德祠)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모덕사(慕德祠)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박도


호남의병 전적지 마지막 순례 길

"내 머리를 잘라도 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

나의 호남의병 전적지 마지막 순례는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당하여 대마도 유배 중 굶어서 순절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전적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분은 산더미 같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으로 옮김)의 해일이 덮치는 방파제에서 온몸으로 파도를 막아내고자 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a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 모덕사

"내 머리를 잘라도 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라는 이 말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새로이 조직된 김홍집 내각이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에 면암이 불복 상소문에 나온 말로, 이기백 선생의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글 첫머리에 인용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동안 국어 교과서가 여러 번 개편되었지만, 이 글은 한 번도 빠짐없이 실렸다. 그만큼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명문(名文)이다. 나는 이 글을 학생들에게 30여 년을 가르쳤으니 최소한 백번은 반복 학습한 듯하다.

면암인들 거대한 개화의 물결에 당신의 항거가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기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덤빔)인 줄 왜 몰랐겠는가.

그러면서도 목숨까지 바치며 항거한 것은 우리의 근본정신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후세들에게 주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귀감으로, 겨레의 제단에 당신을 오롯이 바친 것이다.


나는 학문도 얕고 전문 역사학도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10여 년째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의병 유적지를 더듬는 것은 뒤늦게나마 우리 역사를 배우고자 함이요, 지난날 미처 몰라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함을 뒤늦게 뉘우치면서, 배우고 깨우쳐 숨겨진 바른 우리의 역사를 추수지도하고자 함이다.

2007년 10월 20일, 오직 열정 하나로 호남의병전적지 답사 순례 길을 떠났다. 의병 후손들의 길 안내를 받으며, 한편으로는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써놓은 문헌들의 책장을 넘기면서, 역사의 기록을 확인하고 후손이나 향토 사학자에게 지난날의 증언을 듣는 배움의 길이었다. 


호남 들판에 불을 지핀 인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 가운데 을사조약 체결 이후 사실상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첫 도화선이 된 것은 1906년 최익현의 의병봉기였다. 최익현은 전직 관료이면서 당대 척사파(斥邪派 위정척사파의 준말로 주자학을 지키고 서양의 세력을 물리치자는 학파)의 거두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그는 삼남의 각 지역에서 서로 호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독자적인 의병봉기를 기도하였다. 이때 최익현의 거의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태인의 임병찬(林炳瓚)이었다. … 최익현  의병부대는 6월 4일 무성서원의 강회를 기화로 봉기하여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88~89쪽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태인에서 처음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최익현과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열흘 동안 활동하다가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53쪽

a  면암 선생 유물을 전시한 대의관

면암 선생 유물을 전시한 대의관 ⓒ 박도

태인 의병은 약 열흘 만에 끝났지만 이들이 호남 의병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면암의 뜻을 이은 인물로 백낙구 기우만 고광순 이항선 강재천 기우일 박봉양 양한규 양회일 이석용 전해산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인물들이 호남 의병의 맥을 이어갔다.

아무튼 나는 문헌을 들추면서 면암은 호남 들판에 불을 지핀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한 일화를 소개하면, 녹천 고광순 의병장의 증손 고영준씨가 면암 최익현 선생 고손 최창규 박사를 만나 "당신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안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고 항의하자, 최 박사도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하였다. 어찌 녹천 가문만이겠는가. 호남 의병의 모든 가문, 아니 대한 반도의 모든 항일 가문이 거의 다 그러하였으리라.

한 집안이나 가족들이 받은 수난은 글이나 말로써 다 할 수 없을 테지만, 만일 그런 역사가 없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나는 호남의병전적지 답사 순례 길을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 의병장 후손 고광순 의병장 전적지부터 시작하였지만, 도중에 그 마지막 순례 길은 면암의 전적지로 정하고는 묵묵히 종착지를 향해 걸어왔다.   

종착지를 앞두고 면암 후손을 수소문하였더니 현손(고손자) 최창규 박사가 몇 해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좀처럼 뵙기가 어렵다고 했다. 마침 나의 길 안내자인 조세현 의병정신 선양회 부회장이 당신과 최 박사는 지난날부터 서로 '호형호제' 하는 가깝게 지낸 사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가능한 면담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겠으며, 정히 건강상 최 박사와 대담이 힘들면 대신 부인과 대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한 달 남짓 그 답을 기다려왔다. 

2008년 4월 28일, 나는 오용진 순국선열회 부회장과 미리 모덕사와 면암 묘지까지 순례하고서는 그 전 답사까지 집필을 모두 끝낼 즈음, 조 부회장으로부터 2008년 5월 6일에 요양 간 최 박사가 서울 집으로 돌아온 날이라는 기별과 함께 그날 오후에 대담시간을 약속해 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a  성충사,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성충사,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박도


최익현 선생 행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은 경주인으로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골격이 비범하여 아명을 기남(奇男)이라 하였다. 가세가 가난하여 4세 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1846년 14세 때 화서 이항노(華西 李恒老)의 문인이 되었는데, '면암(勉菴)'이라는 호는 화서에게서 받은 것이다. 1855년 23세 때 명경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면암은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계열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이었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면암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이는 1868년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 중단과 원납전 철폐, 당백전을 폐할 것 등을 상소한 시폐4조(時弊四條)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대원군을 하야(下野) 시킬 수 있었으나, 그 역시 유배당하여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상소를 통한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미 1875년 개항(開港)에 반대하여 이른바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 일명 도끼상소)'를 상소한 바 있지만, 1906년까지 줄곧 30편의 상소를 올려 시종일관 위정척사 사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a  면암 선생이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사하여 기거하셨던 고택인 중화당이다.

면암 선생이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사하여 기거하셨던 고택인 중화당이다. ⓒ 박도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말년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꺾일 우려가 있는 관직생활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며 심지어 면암의 상소에 따라 실각하였던 대원군이 1894년 재집권하게 되었을 때, 개항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표명한 면암을 공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영향력이 큰 면암을 선유대원으로 임명하였으나, 면암은 응하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이 다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날로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그대로 볼 수만 없어 고종을 알현하였지만 별다른 방책이 없이 일제에 의해 2차례나 감금된 상태에서 드디어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

1906년 2월 면암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면암은 문하생 최제학(崔濟學)을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과 연락케 하여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擧義)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은거지 포천을 떠나 태인에 이른 것이 1906년 3월 24일, 면암의 부름에 호응한 인물은 이정규(李正奎)· 김준(金準, 泰元)· 조재학(曺在學)· 이양호(李養浩) 등이었다. 기우만(奇宇萬)과도 만나 거사를 상의하기도 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을 중심으로 동맹록(同盟錄)을 만들게 하니 4월 10일 113명에 이르렀다.

a  무성서원과 병오창의 기적비

무성서원과 병오창의 기적비 ⓒ 박도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를 열어 당일에 80명의 호응을 얻고, 각지에서 군사를 모으며 무기를 준비하였다. 창의(倡義)에 앞서 민영규(閔泳奎)를 통하여 황제에게 의병을 일으킨디는 기병소(起兵疏)를 올려 그 목적을 천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오를 갖추고 4월 13일 태인 읍으로 들어가니 군수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쉽사리 태인을 접수하였다.

1906년 4월 14일 정읍으로 진군하니 군수가 의병을 맞이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무장을 강화하고 의병을 모집한다는 방을 붙여 100여 명의 장정이 증원되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장사에 유진(留陣)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많은 포수들이 호응하여, 의진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6년 4월 15일 구암사를 거쳐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17일 곡성읍으로 머물다가 18일 중진원을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려는 데 남원은 이미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돌려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는 동안 의병부대는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전주의 관찰사와 순창 군수가 일병을 거느리고 습격해 왔다.

1906년 4월 19일 새벽, 면암은 임병찬에게 명하여 접전케 하였으나 길이 어긋나 교전은 없었다. 얼마 후 순창 군수가 면암을 찾아왔다. 면암은 그의 목을 베고자 하였으나 임병찬의 만류로 중지하고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간에도 사방에서 애국 청년들이 몰려와 군사의 수는 800여명으로 늘었으나 무장을 갖춘 사람은 200여 명에 불과하였다.

1906년 4월 20일 새벽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칙지(勅旨)와 고시문을 보내왔다. 면암은 기병소(起兵疏)를 올렸으니 곧 황제의 비답을 받게 될 터인즉, 일개 지방관찰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 때 이미 옥과(玉果)와 금산(錦山)에 관군과 일병들이 출진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면암은 그들을 맞아 싸우고자 하였는데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여 그들이 일인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임이 판명되었다.

당시 의병들이 부딪친 가장 어려운 점은 관군과의 접전이었다. 의로운 의진의 행군을 막는 자는 모두 일인들의 앞잡이이므로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일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면암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의진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모두 흩어지고 22명이 남아서 면암을 호위하고 있었다. 관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1906년 4월 21일 새벽 면암과 호위 유생 12인이 남았고,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때 이들은 경전을 돌아가며 외우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22일 광주 일제 고문관의 심문이 있었고, 23일 전주 진위대와 일병에 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면암 일행은 서울에 있는 일군 사령부에 갇혀 1906년 6월 26일 형을 받게 되었다. 면암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노령으로 대마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  1906년 4월, 면암 선생이 호남 의병대장으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고 있다.

1906년 4월, 면암 선생이 호남 의병대장으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고 있다. ⓒ 박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그리고 충남 청양군 모덕사관리사무소 홍보책자와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그리고 충남 청양군 모덕사관리사무소 홍보책자와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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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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