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역사소설 소현세자 46] 세자관을 찾아온 여인

등록 2008.05.14 14:08수정 2008.05.1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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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관. 세자관으로 알려진 심양 아동도서관 ⓒ 이정근


세자관에 도착한 가마 한 대

세자관은 적막에 휩싸였다. 죽음의 공포다.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한 충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 죽느냐 사느냐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세자관 에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가마 한 대가 멈췄다. 호위군사와 시녀가 딸린 청나라 가마였다.


"관문을 열어라."
가마를 선도한 군사가 검은 말 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화들짝 놀란 수문장이 뛰어나갔다.

"어디서 온 뉘신지요?"
수문장은 호위군사 뒤에서 펄럭이는 정홍기(正紅旗)를 발견하지 못했다.

"밖에서 보는 눈들이 많다. 들어가서 말하겠다. 어서 문을 열어라."
조급한 목소리였다. 육중하게 닫혀있던 세자관 정문이 열림과 동시에 멈춰있던 가마가 세자관으로 빨려들어 갔다. 문밖의 소란에 놀란 익위 서택리가 튀어나왔다.

"어디에서 오셨는지요?"
가마는 세자관 안으로 들어왔으나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왕전에서 왔다."
기겁을 한 서택리가 그때서야 살펴보니 붉은 색 바탕에 노란 용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홍기(正紅旗). 조선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깃발이다. 한 때, 조선 강토를 짓밟았던 깃발이며 삼전도에 나부꼈던 깃발이다. 그러한 깃발이 아무런 예고 없이 세자관에 들이닥쳤으니 기절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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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군. 4기군 깃발. 8기군의 전신이다. ⓒ 이정근


만주벌판을 석권한 누르하치는 항복하거나 정복한 부족들을 시기(矢旗) 군사계급으로 흡수 편입시켜 8자 홍타이지에게 남색기, 2자 다이산에게 백색기, 12자 아지거에게 황색기, 14자 도르곤에게 적색기를 내리고 아들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다.

8기군의 전신 4기군이다. 그렇다면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 아닌가? 깜작 놀란 서택리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예친왕전에서 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누구시라더냐?"
빈객 박노가 되물었다.

"가마에서 아직 내리지 않았습니다."
박노가 부리나케 뛰어 나갔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여인

"안으로 드시지요."
박노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으나 가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박노가 무릎을 꺾어 가마 문을 들어 올렸다. 그때서야 가마에 앉아 있던 내방객이 밖으로 나왔다. 가마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였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웠다. 의외였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홍왕전에서 찾아오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인을 세자전으로 모셔라."
시종관이 명령하듯 말했다. 박노를 따라 나온 시직 이헌국이 앞서고 박노가 뒤따랐다. 정원을 지나 회랑으로 꺾어들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귀관이 박노라는 빈객이오?"
박노는 귀를 의심했다. 비단 청의를 걸친 여인의 입속에서 조선말이 튀어나오다니 귀신에 홀린듯 했다.

"하오만 어찌 조선말을…."
"조선 사람이 조선 말 하는 거가 뭐 그리 놀랄 일이오?"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입술이 따뜻해 보였다.

"세자저하! 홍왕궁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박노가 세자에게 고했다.

"뫼시어라."
세자와 여인이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고국의 차를 마시니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세자께서 정뇌경 일로 마음고생이 심하다 하여 위로해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뇌경을 구명하려고 노력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여인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속에 녹아있던 카페인이 안타까움으로 변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범문정의 위세를 꺾으려는 전하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청나라는 황제를 정점으로 바로 그 아래 도르곤을 비롯한 십왕이 있다. 청나라 사람들은 황제를 폐하, 왕을 전하라 불렀다. 그리고 황제의 여자를 후궁, 왕의 여자를 궁인이라 불렀다.

"그러셨습니까?"
"범문정을 누르려는 판세가 당분간은 지속될 터이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예까지 왔으니 빈궁을 뵙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청이었다. 부랴부랴 강빈을 불러왔다.

"빈궁마마께 문후 여쭙니다."
여인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한 강빈은 예를 어떻게 갖추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조선말을 하는 여인을 세자가 정중히 대하고 있으니 더욱 난감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네."
강빈은 처음인 것 같지만 여인은 처음이 아니다. 여인이 강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연민의 시선이다. 그의 뇌리에는 압록강을 건너는 뱃전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석철이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강빈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빈은 자리에서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세자전을 나와 정원을 지나던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도울 일이 있으면 힘이 미치는 한 세자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조국은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남자. 가까이 할 수 없는 남자라며 도리질을 치면 칠수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남자. 어려움에 처하면 처할수록 돕고 싶은 남자 이왕.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찾아 왔건만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여인. 회화나무 가지에 걸쳐있는 초승달이 여인의 마음을 훔쳐보고 있었다.

'무력'보다 '머리'가 필요한 홍타이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축이 있다. 하나는 도른곤을 중심으로 한 무장 집단이었고 또 하나는 범문정을 정점으로 한 문신이었다. 청나라가 몽고를 정벌하고 조선을 유린한 데는 도르곤의 공이 컸다. 그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지대한 공이었다. 하지만 조선과 몽고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존재였다.

이제는 명나라다. 중원을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 청나라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다. 홍타이지의 시선은 만리장성에 꽂혀 있다.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범문정의 머리가 필요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명나라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범문정의 지혜가 필요했다. 홍타이지의 총애가 범문정에게 쏠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도르곤의 위세에 눌려있던 범문정이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며 예부를 접수했다. 형부를 장악하기 위한 각축전에서 병부와 부딪힌 것이다. 한마디로 도르곤과 범문정이 충돌한 것이다.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던 정뇌경이 분기탱천하여 가세한 것은 결과적으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된 것이다.
#소현세자 #강빈 #정뇌경 #도르곤 #범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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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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