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자존은 무엇이고 사대는 무엇인가?

[역사소설 소현세자 47] 약소국의 신하 정뇌경의 죽음

등록 2008.05.16 18:19수정 2008.05.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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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관. 심양에 있는 아동도서관이 세자관 터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세자관 자리는 다른 곳이라는 설이 제기 되었다. ⓒ 이정근


조선에서 보내온 자문을 받은 청나라는 냉담했다. 조선 국왕도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뿐이지 국왕도 뇌물사건의 전모를 사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선에서 돌아온 용골대가 부하를 시켜 빈객 박노와 신득연을 호출했다.

"정뇌경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조선에서도 이미 자문을 보내왔으니 지금 처치할 것이다."
"속바칠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국왕이 재신으로 하여금 속바치라 지시하였는가?"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그럼, 세자가 스스로 속바쳐 죄인을 구명하려 하는가?"
"아니옵니다. 젊은 사람이 불쌍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세자관 재신들이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처럼 그를 구하려는 것인가?"

"국왕의 본뜻은 자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세자와 대군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같이 있은 지 오래되어 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이 계책을 내었을 뿐입니다."

"우리를 해 하고자 도모한 자를 구원하려는 너희들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코기를 너희들이 먹은 뒤에야 마음이 쾌하겠는가?"


용골대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옆자리에 있던 마부달의 눈도 이글거렸다. 살기등등한 그들에게 박노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이봐라! 재신을 따라가 죄인을 끌어내라."


용골대가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세자관으로 돌아온 박노는 자초지종을 세자에게 아뢰었다. 보고를 받은 세자는 침통한 모습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정뇌경은 세자의 신임을 받아 세자가 임금에게 보내는 문안사(問安使)에 발탁되어 조선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신하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이 뼈저린 아픔으로 가슴을 할퀴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세자가 박노를 불렀다.

조선의 엘리트가 생명이 위급하다, "그를 구하라"

"정뇌경은 시강(侍講)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나와 용감하게 배종(陪從)했다. 갖은 고난을 겪으며 공로가 많았는데 이런 망극한 화를 당하니 몹시 불쌍하다. 몸소 궐하에 나아가서 대죄하고 변명하고자 한다."

정뇌경. 나이 31세. 그는 명나라 황태자 탄신 기념 별시에 합격하여 부수찬으로 조정에 출사했다. 정언과 지평을 거치며 문학에 오른 젊은 엘리트이며 조선의 동량이었다. 삼전도의 강화조약에 의거 세자가 한성을 출발 할 즈음 모든 신하들이 심양으로 떠나기를 주저할 때 자진해서 따라나선 사람이다.

"이 나라의 습속은 죄인을 신구(伸救)하면 동참한 것으로 의심합니다. 저들이 현재 본국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결코 가벼이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렇게 잠자코 있을 수야 없지를 않느냐. 채비를 놓도록 하라."

"아니 되옵니다. 세자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뭣 들 하는 게냐? 어서 채비를 놓지 않고?"
세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채비를 갖춘 세자가 세자관 정문을 나섰다.

세자를 가로막는 발칙한 행동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정명수가 세자의 말(馬)을 가로막고 나섰다. 발칙하고 당돌한 말이다. 본국에서라면 능지처참할 무엄한 행동이다. 하지만 여기는 심양 땅. 세자는 볼모로 잡혀와 있고 정명수는 청나라의 역관이다. 신분으로 따지면 하늘과 땅 차이지만 세자는 힘이 없고 정명수는 힘이 있다. 정명수를 넘지 못한 세자가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죄인은 빨리 나와라."

사기가 오른 정명수가 고함을 질렀다. 나오지 않으면 끌어낼 태세다. 별채에서 문밖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정뇌경이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세를 판단한 것이다. 관문을 향하던 정뇌경이 세자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세자저하.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땅에 엎드려 세자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정뇌경이 일어났다. 정뇌경과 세자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의 시선은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슬픔의 눈빛은 아니었다. 하루 빨리 강건한 나라를 만들어 자신과 같은 불행한 신하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애원의 눈빛이었다.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는 세자가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뇌경이 동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상감마마. 부디부디 강녕하시옵소서."
무릎을 꺾은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임금님이시여! 젊은 신하에게 왜 이런 한을 남겨주시나이까?"

두 번째 무릎을 꺾은 그는 가슴으로 통곡했다. 이 시대. 약소국은 뭐고 강대국은 뭘까? 강대국에 빌붙은 매국노는 살아야 하고 그를 처단하려는 신하는 죽어야 한다니? 약소국의 신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피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임금님이시여! 임금님이시여!! 백성들의 한을 거두어 주소서."

세 번째 무릎을 꺾은 그는 심장의 박동이 멎는 듯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던 남한산성의 군사들. 길거리에 널 부러져 있던 시신들. 포로로 끌려가며 가죽 채찍에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 삼전도에서 심양까지 걸어오면서 목격했던 백성들의 모습이 망막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시대의 자존은 무엇이고 사대는 무엇인가?

"임금님이시여! 임금님이시여!! 우리 임금님이시여!! 강건한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

네 번째 무릎을 꺾은 그는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오열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군사들에게 거적 한 장 내주며 오랑캐와 싸워 라고 독려하던 장수들. 배고픔에 허덕이는 군사들에게 말을 잡아 먹이라고 명하던 군주. 홍이포 한 방에 혼비백산하면서도 명나라에 충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대신들. 무엇이 자존이고 무엇이 사대인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동쪽을 향하여 임금에게 4배를 올린 정뇌경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며 다시 절을 올렸다. 고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불효자를 용서하시라는 하직인사였다. 예를 마친 정뇌경이 청나라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죄인은 꿇어앉고 세자는 들어가지 마시오."
돌아서려는 세자를 용골대가 불러 세웠다.

"실시하라."
집행관이 정뇌경의 목에 휴대용 올가미를 걸었다. 말의 목덜미 가죽을 잘게 쪼개어 꼬아 만든 가죽 끈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집행관이 힘을 가했다. 목에서 태어난 끈이 손목을 통하여 목을 조르는 형국이다.

정뇌경은 숨이 턱 막혀 왔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더니만 시야가 흐려졌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울부짖는 모자가 나타났다. 포로시장에서 팔려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헤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만 이내 편안해졌다.

세자가 보는 앞에서 정뇌경을 교살한 청나라는 곧바로 강효원도 죽였다. 소현세자는 세자관 문밖에서 신하가 목 졸려 죽는 참담한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소현세자 #정뇌경 #심양 #용골대 #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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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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