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가 앉아서 사신을 맞도록 하라"

[역사소설 소현세자 58]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시행하라

등록 2008.06.08 20:02수정 2008.06.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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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창덕궁 정문이다. ⓒ 이정근



청나라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압록강을 건넜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주가 얼어붙고 조정이 떨었다. 청나라와의 외교 현안을 어떻게 논하는 준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청나라 사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무엇을 얼마만큼 안겨주어 사신을 흡족하게 할까? 이것이 문제였고 그 방도에 급급했다.


의주에서 칙사 대접을 받은 만월개가 남행길에 올랐다. 한양 천리. 발길이 닿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서두를 것이 없다. 거들먹거리며 유유자적이다. 그의 발자취는 속속 조정에 보고되었다. 어느 고을에 묵었으며 어떠한 대접을 했다는 상세한 내용이 1일 보고되었다. 의주를 떠난 만월개가 용천과 선천을 지나 정주에 이르렀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그의 발걸음이 한양에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소원 조씨다. 창덕궁 깊은 곳. 후궁전에서 청나라 사신 만월개가 정주에 이르렀다는 소식에 가슴을 조이던 소원 조씨가 의원 이형익을 불렀다.

"보잘것없는 시골 의원을 내가 궁으로 불러들인 은혜를 잊지 않았겠지?"
소원 조씨의 얼굴이 사뭇 굳어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마!"
이형익이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에 오는 사신은 '군대를 보내라' '식량을 보내라' 이러한 나랏일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 전하의 병환을 살피러 오는 사신이다. 이 사신의 눈에 전하의 용태가 예사롭지 않게 비춰졌을 때 나는 끝장이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네. 마마!"


이형익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소원 조씨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용상에 앉아 있는 임금에게 퇴위라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의 운명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위(位)를 잃은 임금의 후궁들의 말로는 참혹하지 않았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평복으로 갈아입고 정업원에 들어가는 후궁들의 신세가 남의 일만 같았는데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후유증은 다음 문제다. 무조건 일어나 앉도록 하라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지금 누워있는 전하가 앉아서 사신을 맞도록 하라."
소원 조씨는 단호했다. 노력 하라는 것이 아니라 꼭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 하려면 번침을 부백과 음능천 그리고 삼음교에 많이 놓아야 하는데 전하께서 일어나는 데는 효험이 있으나 후유증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형익이 난처한 듯 말 꼬리를 흐렸다.

"후유증이라 했느냐?"
소원 조씨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네. 마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용태를 호전시키라는 내 말을 잊었느냐?"

"하지만 마마! 기를 한곳으로 모으면 잠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있으나 다시 쓰러지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닥쳐라. 지금 전하에게 필요한 것은 앉아 있는 것이다."
가냘픈 목소리가 고성으로 변하며 서릿발이 내렸다.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소원 조씨의 호통에 이형익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 나왔다.

"수위조절을 잘 못하면 전하께서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영원히 일어나지 못 할 수도 있다. 예상 밖의 그러한 결과가 도래하면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 그럴 경우 후궁마마가 내 목숨을 지켜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후궁전을 물러나오는 이형익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소원 조씨의 외갓집에 드나들다 궁으로 불려 들어갈 때만 해도 출세하는 줄 알았다. 한낱 충청도 시골 의원이 궁에 들어가 쟁쟁한 어의들을 물리치고 지엄하신 임금님을 치료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자부심이었다. 허나 자신의 쓰임새가 한낱 후궁의 사사로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시술 또한 생명을 담보로 한 도박이라 생각하니 두려웠다. 한편, 심양 세자관에 회은군 딸 이씨가 찾아왔다.

고국에 나가실 수 있게 되었소

"고국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조선에서 군대를 보내오는 것을 돈으로 속(贖)하라는 황제의 명이 계셨다 하옵니다. 또한 세자저하께서 곧바로 책봉식을 거행하고 지금 조선에 나가있는 사신에게 '세자의 귀국을 바랍니다'라는 청을 보내오면 저하께서 고국에 나가실 수 있도록 준비가 다 되었다 하옵니다. 감축 드립니다."

반가운 소식이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희소식인가. 마음은 고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었다. 세자빈을 두고 혼자 나가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영구 귀국이 아니고 다시 들어오라는 얘기다. 소현은 착잡했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즉시 장계를 작성하여 한성으로 보내라 명했다.

평양과 개성을 지난 사신이 드디어 한양에 입성했다. 서교에서 대신의 영접을 받은 만월개는 모화관에 여장을 풀고 어의를 불렀다.

"병세가 어떠한가?"
"번침을 맞고 계십니다."
의관 유달이 아뢰었다. 유달은 심양에 출장하여 황실 가족들을 치료한 경험이 있는 청나라에서도 그 의술을 인정하는 의관이었다.

"왜 침을 맞지 않고 번침을 맞고 있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것이…."
유달이 말끝을 흐렸다.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사실대로 아뢰어라."
만월개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후궁전에서 보내온 의원이 번침을 놓고 있습니다."
"뭣이라고? 후궁이 보내온 의원이라고?"
"네 그러하옵니다."

"궁에서 요변(妖變)이 있었다는 소문을 심양에서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곁에 있던 역관 이잉질석이 다그쳤다.

"저주하는 망측한 물건이 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는가?"
"죄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죽임을 당했다는 말인가? 스스로 죽었다는 소린가?"
"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몇 점을 줄지 그것은 오로지 만월개의 마음에 달렸다

모화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만월개가 창덕궁으로 인조를 찾았다.

"침구(鍼灸)도 효험이 없는 큰 병을 얻어 이 지경에 이르렀소."
침을 꽂고 침전에 누워있던 인조가 겨우 일어나 앉으며 만월개를 맞이했다.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침 맞는 곳을 보여 주시오."
곁에서 시중들고 있던 상궁과 나인의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앉아 있던 인조가 만월개를 가까이 오게 했다. 인조의 옆머리와 정강이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침이 꽃혀 있었다.

"병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허언(虛言)이겠습니까. 오래 앉아 계시면 옥체를 상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누워 있도록 하십시오."
인조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정축년에 우리 아들들을 돌봐 주어서 잘 보전될 수 있었소. 아들들이 대인의 덕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과인이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소. 심양에 있는 아들들도 오늘까지 두터운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황제께서 나를 시켜 세자와 대군을 잘 보호하게 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모두 황제의 은혜입니다. 내가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대인의 은혜 잊지 않으리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조리하십시오."

다례를 마치고 만월개가 침전을 물러나왔다. 이제 병세를 파악하는 면접시험은 끝났다. 시험 성적에 따라 왕위가 흔들릴 수 있다. 채점관은 만월개다. 몇 점을 줄런지 그것은 오로지 만월개의 마음이다. 조선 국왕의 자리가 만월개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가 모화관으로 돌아가는 길. 인조가 내린 환도와 표피가 뒤따라 갔고 후궁전에서 보낸 금은보화 선물보따리가 수레에 실려 갔다.
#소현세자 #사신 #만월개 #모화관 #소원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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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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