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에 태어난 여자의 한, 폭발하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61] 조선은 봉이다

등록 2008.06.15 19:58수정 2008.06.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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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들이 천상의 맛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배 ⓒ 이정근



첩보전이 불을 뿜는 세자관


‘조선은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보낸다.’ 는 강화조약 셋째조항에 따라 소현세자가 볼모살이를 하는 곳이 심양관이다. 하지만 이곳은 세자의 단순한 거주 공간만이 아니다. 청나라와 조선의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곳이고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는 조정은 세인(細人)을 박아놓고 첩보를 수집하는 정보의 각축장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인 첩자(諜者)를 풀어 세자관의 동태를 감시했고 심양관은 간인(間人)을 가동하여 청나라의 정보를 수집했다. 인조는 장계라는 공식 보고 채널 외에 간자(間者)를 심어놓고 세자와 세자빈의 행동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소원 조씨는 세작(細作)을 밀파하여 심관의 동궁과 강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청나라의 내부사정을 은밀히 탐문해 보니 황제가 ‘조선 국왕이 기동을 못하여 칙명을 맞을 수 없을 정도라면 이는 칙명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라고 말하였답니다.”

밀계를 읽어 내려가는 승지의 손이 떨렸고 듣고 있던 인조의 낯빛이 파리하게 변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니 온 몸이 땅 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청나라에서 기동을 못하는 폐인 취급하고 있으니 천길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제주에서 유배생활하고 있는 광해군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도 폐위되면 광해와 같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참담하기만 했다.

후궁 소생이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불안감


곁에서 듣고 있던 소원 조씨도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전하가 왕위에서 내려오면 옹주와 숭선군은 어떻게 되는가? 새로이 왕위에 오른 소현이 아들을 살려두지 않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폐주가 된 광해군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후, 탈출을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살한 폐세자의 일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숭선군은 세자도 아니고 정실 자식도 아니기 때문에 무사할 것이다.’ 애써 자위해 보았지만 후궁 소생이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전하의 용태가 어떠한가?”
이형익을 바라보는 소원 조씨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번침을 조금 더 맞고 죽력(竹瀝)을 드시면 쾌차하실 것입니다.”
머리를 조아렸으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틀림없으렷다.”
소원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소인을 믿어 주십시오.”
이형익과 조소원만이 해독할 수 있는 눈빛이 오고 갔다.

“의원은 침을 더 놓고 어의는 죽력을 받들어 들라 이르라.”

소원 조씨의 명이 떨어졌다. 창덕궁 희정당의 주인은 임금이다. 그렇지만 임금이 환자가 되어 누워 있다. 주인공이 병환으로 쓰러져 있으니 소원 조씨가 대장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법도에 어긋났지만 종실을 대표하여 시종한 임금의 형과 대소신료들이 감히 제지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기적이 일어났을까? 이형익의 의술이 신통술을 부렸을까? 번침을 맞고 죽력을 들던 인조가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다.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사경을 헤매던 인조 곁을 떠나지 않고 편전을 지키던 소원 조씨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기고, 퍼주는 것이 상책이다

“어찌하면 좋겠소?”
조소원의 손목을 붙잡은 인조의 눈동자는 힘이 없었다.

“일이 불거지기 전에 먼저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선물도 몽땅 보내야 합니다.”

조소원의 순발력은 놀라웠다. 알아서 먼저 기고 뇌물공세를 펼치자는 것이다. 패전의 군주로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인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사를 챙길 정도까지 회복한 인조가 비변사회의를 소집했다.

“황제께서 병문안을 보내 온 것은 특별한 배려이니 사은하는 예를 갖춰야 할 것이다.”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로 하면 좋겠는가?”

“전하의 환우에 대한 문안이었으니 영의정을 보내는 것이 합당한줄 아뢰옵니다.”

“홍시와 생리(生梨) 그리고 청죽을 가득 실은 수레와 함께 중사(中使)를 먼저 보내고 최명길은 옥에 구금되어 있는 향화호인(向化胡人)을 압송 해 가도록 하라.”

최명길이 이끄는 본진에 앞서 선발대를 보내 물량공세를 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와의 의리 때문에 송환을 주저했던 명나라 유민을 끌고 가 헌상하라는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 와중에 명나라를 탈출한 망명객들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의리? 사치스럽다. 자존심? 거추장스럽다. "모두 버려라"

그동안 청나라는 명나라에서 탈출한 전직 장수와 관리들의 송환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아직도 명나라를 지존으로 생각하고 있는 조선은 다른 매를 더 맞으면서도 이들의 송환을 거부해 왔다. 이는 명나라의 부활을 기대하는 조선의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이제 이마저 버리자는 것이다.

유목민족 청나라 사람들은 만주에서 생산되지 않은 조선의 특산품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달콤한 홍시와 사각사각한 배(梨)맛은 가히 일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맛을 본 황실과 세력가들은 시도 때도 없이 홍시와 배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홍시가 없을 때는 곶감과 배를 보내주었다. 천상의 맛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그들은 가족과 나누어 먹기도 했지만 암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감과 배는 인삼, 담배와 함께 밀거래 상품의 주요 품목이었다.

사은사 최명길과 부사 이경헌이 심양으로 떠나기 위하여 임금을 알현했다.

“이번 사은사가 가는 길에 대군을 교체하는 일을 청국에 말하라.”

당장이라도 세자를 소환하고 싶었지만 힘이 미치지 않았다. 인평대군을 보내고 소현세자를 불러 오는 형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한성을 떠난 최명길이 압록강을 건너던 날, 심양에서 보낸 장계가 한성에 도착했다.

“조선은 봉이다.” 돈되는 것을 울궈라

“칙사가 나갑니다.”
왠 칙사? 하지만 보내는데 어찌할 것인가? 맞이하는 도리밖에 없다. 부랴부랴 원접사를 꾸려 국경으로 파견했다. 칙사로 날이 세고 사신으로 날이 저무는 날의 연속이다. 의주에 도착한 원접사 정태화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칙사가 강을 건너 온 뒤에 그의 임무를 탐문해 보았더니, 삼전도 비를 확인하기 위하여 현장을 방문한다 합니다. 또 정명수가 별도로 말하기를 ‘청대죽 15태(駄)와 홍시 20태, 생리 10태를 봉황성까지 수송하라.’ 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봉이었다. 임금이 사신에게 선물 이상의 뇌물을 바리바리 싸 바치고 이제 역관이 뇌물을 공공연히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역관들은 이렇게 받은 뇌물을 국경마을에서 처분하여 돈으로 환전했다. 사신과 역관들의 조선 행차는 축재의 수단이었다.

마부달을 정사로 한 오다하와 초고로 일행이 한성에 도착했다. 도성에 입성한 칙사 일행은 창경궁으로 이어한 인조를 방문하고 칙서를 반사(頒賜)했다. 인조는 정전이 아닌 침전에서 칙사를 접견했다.

조선 임금을 능멸하는 청나라 사신

“황제의 공덕비는 마무리했소이까?”

“우리나라 비문을 새겨야 할 후면은 이미 한자로 완성하였고 몽고문자로 새겨야 할 전면과 만주문자를 새겨야 할 측면은 대기하고 있습니다.”

“알았소이다. 내일 나가 볼 테니 차비를 준비하도록 하시오.”

청나라 사신들의 거드름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일국의 왕에게 하대성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날 밤. 모화관에 든 정명수는 사신과 역관은 물론 만주문자를 새기기 위하여 데리고 온 석공들의 방에도 방기를 넣어줄 것을 요구했다. 거절할 힘이 없는 조선은 기생을 넣어 주었다. 사신과 역관들에게 조선은 엽색행각의 놀이터였다.

야심한 밤. 정명수의 방에 들어간 기생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뒤이어 정명수가 뛰어 나왔다. 뒤좇아 나온 정명수와 기생 간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심야의 소동에 깜짝 놀란 사신숙소 숙위대장 변호길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왜 그러느냐?”

“저, 조선 놈도 아니고 되놈도 아닌 저놈이 별짓을 다 시켜요. 아, 글쎄 입에다 그것을 넣어라나 뭐라라. 원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짓을 시키지를 않나. 저놈은 변태야 변태.”

기생은 길길이 뛰었다, 게거품을 뿜어대는 여인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아닌 밤중에 모화관 마당에 소동이 벌어졌다. 기생이 내세운 이유는 구실이었다. 기생노릇도 서러운데 임금을 능멸한 오랑캐의 색받이라니? 약소국에 태어난 여자의 한이 폭발한 것이다. 한 맺힌 여자의 목소리가 인왕산을 흔들었고 밤하늘을 울렸다.
#심양관 #배 #칙사 #방기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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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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