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잃어 버린 폐교 운동장에는 풀만 우거져

[도보여행] 해산령에서 비수구미 마을 지나 평화의 댐까지 걷기

등록 2008.06.18 08:55수정 2008.07.2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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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만 남은 수동분교 ⓒ 유혜준



이끼가 잔뜩 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비석 같은 돌기둥 두 개가 있습니다. 비석이라고 하기에는 폭이 조금 좁지요.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이 곳은 학교 입구였습니다. 폐교가 되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자 모습이 흉물스럽게 변한 것이지요.


이 학교는 오래 전에 '동촌국민학교 수동분교'로 불렸다고 하네요. 학교 입구의 돌기둥에는 학교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대신 흔적만 남았습니다. 대체 누가 명패를 가져갔을까, 궁금합니다. 그것도 쓸 데가 있었나 봅니다. 아니면 어딘가에 버려졌던가.

학교 안으로 들어갑니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풀을 헤치면서 그 길을 따라 들어갑니다. 학교 건물 한 동이 왼쪽으로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사택이었던 것 같은 건물이 한 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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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분교 건물 내부. ⓒ 유혜준



열린 미닫이문을 통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교무실이네요. 안쪽 문으로 나가니 좁은 복도입니다. 허걱, 공포영화에 등장하면 딱 어울릴 것 같습니다. 쌓인 먼지와 뜯긴 문짝, 덜렁거리는 천정의 베니어판. 교재실이라고 쓰인 아크릴판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습니다. 그 옆은 도서실이고, 그 다음은 1·2·3학년이 같이 쓰던 교실이었나 봅니다. 창틀마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습니다.

교실 안으로 들어갑니다. 교실 안에는 책상과 걸상이 두 개씩 놓여 있습니다. 학생이 두 명밖에 없었나? 교실 한쪽의 문짝 없는 장에는 엎어서 쌓은 식판이며 마호병, 물컵 등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습니다. 누가 쓰던 것이었을까요?


이름을 잃어 버린 폐교에는 세월의 흔적만큼 먼지가 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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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령 표지석 ⓒ 유혜준




15일, 강원도 화천의 해산령에서 비수구미 마을을 지나 평화의 댐까지 걸었습니다. 걸은 시간은 얼추 6시간 정도이며, 걸은 거리는 20km정도 됩니다. 화천의 비수구미 마을은 잘 알려진 오지마을입니다. 해산령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걸어 들어가야 한다네요.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덕분에 인적이 드문 길이 사람들로 북적였지요. '공휴일 도보팀'이라고 꼭 강조해달라네요.

서울에서 출발해 해산터널을 지나 해산령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15분경이었습니다. 세 시간가량 걸렸지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비수구미 마을을 향해 12시경에 출발했습니다.

자잘한 돌이 깔려 있는 길을 걷습니다. 사람이 일부러 잘게 부순 흔적이 있습니다. 걷기 좋은 길을 만드느라 그랬을 겁니다. 길옆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십 여분쯤 걸어가니 계곡이 나옵니다. 물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아주 맑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물이 오염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길옆에 산딸기가 보입니다. 따먹는 사람들이 없어 마음 놓고 익어가는 산딸기에 벌레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네요. 그래, 너 다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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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세 마리. ⓒ 유혜준



길은 산으로 계곡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네요. 그 길을 언제까지 걸으라고 해도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습니다. 하늘빛, 참 아름답습니다. 도시에서는 하늘을 보지 않게 되는데 길을 나서면 하늘이 알아서 눈으로 스며들어 줍니다. 참 신기하지요?

한 시간쯤 걷다가 물 맑은 계곡에서 멈춰섭니다.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면 신선이 따로 없을 것 같아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습니다. 아, 시원해라.

다시 길을 나섭니다. 걷다보니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들어 길 위쪽을 보니 개 세 마리가 매여 있습니다. 우리를 보고 꼬랑지를 '격하게 '흔드는 걸 보니 반갑다는 인사인가 봅니다.

화천의 오지, 비수구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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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 유혜준



해산령에서 출발해 두 시간 가량 걷자 노란색 민박집 표지판이 보입니다. 비수구미 마을에 찾아와 가끔 민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파로호에서 낚시도 하고, 평화의 댐까지 걷기도 한답니다. 오지마을이라지만 잘 뚫린 흙길을 걷다보니 오지 같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웃마을에 마실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드네요.

파로호가 보입니다. 물은 언제 보아도 시원하게 마음을 씻어주지요. 물길은 길게 이어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습니다. 기품 있게 잘 자란 소나무는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은은한 솔향기가 퍼지네요.

파로호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북한강 협곡을 막아 화천수력발전소를 건설할 때 생긴 인공호수라고 합니다. 그 때가 1944년이었다지요. 파로호라 이름 붙인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랍니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인데, 이 곳에서 6·25때 국군이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시켰다고 합니다. 설마, 이 곳에서 한밤중에 중공군 유령이 떼로 출몰하는 건 아니겠지요. 

파로호 건너 완만한 봉우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습니다. 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곳에 말뚝이 박혀 있고 '고사리 재배'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끝이 구부러진 고사리가 보이네요.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세 칸짜리 집이 보입니다. 담 옆에 고르게 팬 장작이 쌓여 있습니다. 이 곳에도 전기는 들어오나 봅니다. 집 옆에 동그란 등이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이 곳에 어둠이 스미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겠지요.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저 등을 켜면 어둠이 조금은 옅어지겠지요.

오지마을에도 전기는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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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 유혜준



또 다른 민박집 표지판을 지납니다. 소나무가 한 그루가 기품 있게 서 있습니다. 독야청청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길 옆에 웅덩이가 있습니다. 물만 고여 있나 했더니 개구리가 잔뜩 모여 꼬물거리고 있습니다.

"참개구리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말합니다. 우툴두툴한 등에 검은 얼룩이 박혀 있습니다.

띄엄띄엄 집이 보이는데 몇 집은 비었습니다. 빈 집 옆에 앵두나무가 서 있습니다. 잘 익은 앵두가 다닥다닥 열렸습니다. 반갑다 앵두야, 너 참 오랜만이다. 앵두 한 알을 입안에 넣고 깨물자 새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아, 드디어 폐교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끼 낀 돌계단 옆으로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길 끝에 폐교가 있다는 걸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일 것 같습니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 폐교를 둘러봅니다. '수동분교'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이름은 잊히고 그냥 폐교라고 불리네요.

폐교를 둘러보고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옵니다. 한 시간쯤 내려오니 계곡이 보입니다. 계곡에서 잠시 쉬었다가 평화의 댐 쪽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평화의 댐이 이날 도보여행의 종착지입니다. 눈으로 볼 때는 가까워 보이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그게 아닙니다. 실물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멀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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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넙니다. ⓒ 유혜준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제외한다고 해도 네 시간 이상을 걸었습니다. 지칠 때도 되었지요. 이번 여행길에 따라나선 동생이 다리에 힘이 풀려 걷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대신 걸어줄 수도 없는 노릇. 쉬엄쉬엄 같이 걸어갑니다.

너른 풀밭이 펼쳐집니다. 풀들이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합니다. 댐의 물이 많이 빠져 모습을 드러낸 다리를 건넙니다. 다리 옆에는 모터 달린 배가 두 척 매여 있습니다. 물이 많으면 그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답니다.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좋을텐데, 아쉬워 하면서 배를 돌아봅니다.

파로호를 따라 천천히 걷습니다. 전에는 물에 잠긴 자리가 물이 빠져 길이 되었습니다. 자동차가 한 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갑니다. 그 길을 벗어나니 너른 길이 나옵니다. 햇볕이 아주 따갑습니다.

댐으로 가는 길옆에는 금계국이 잔뜩 피어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금계국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금계국, 보면 볼수록 마음을 사로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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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 종탑 ⓒ 유혜준



저 멀리 'BELL PARK'라고 쓴 것이 보입니다. 그 위로 구조물 하나가 보입니다. 그게 종이라네요. 그곳까지만 가면 된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잘 포장된 도로 위를 터덜터덜 걷습니다. 걷고 또 걷노라면 나중에는 지루해집니다. 그래서 도보여행을 할 때는 인내심이 필요하지요.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걷고 또 걷자, 이러면서 걷는 것이지요.

드디어 종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습니다. 종이 매달린 곳이 아주 까마득해 보이지만 올라가야지요. 나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종을 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쇠로 만든 게 아니라네요. 일행 중 한 분이 껑충껑충 뛰어서 손으로 만져봤더니 플라스틱이더라는 겁니다. 확인은 안 했습니다.

쇠든 아니든 별 상관이 없는데도 그 말을 듣자 속·았·다, 뭐 이런 느낌이 들더군요.

해산령에서 비수구미 마을을 지나 평화의 댐까지 걷는 도보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걸을 때는 힘들어도 다 걸으면 새롭게 힘이 납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래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는가 봅니다.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평화의 댐 주변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화장실에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 안 나오는 화장실, 그거 끔찍하지요. 물을 안 줄 거면 아예 처음부터 푸세식으로 만들던지…. 이거 누구 솜씨입니까?
#도보여행 #폐교 #비수구미 #파로호 #수동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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