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과거다, 현실이 가슴 아프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67] 봉황성에서 맞교대하는 조선의 인질

등록 2008.06.30 08:36수정 2008.06.30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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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압록강 표지석. ⓒ 이정근



원손 일행이 대동강을 건넜다. 꽁꽁 얼었던 대동강은 풀렸지만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호종하는 신하들은 종종 걸음을 쳤지만 가마에서 흔들리는 석철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를 만나러 간다니 너무 좋았다. 하지만 철없이 싱글거리는 원손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호종 신하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청천강을 건넌 원손 일행은 의주를 향하여 잰걸음을 놓았다. 이번 북행길은 즐거운 행차가 아니다. 사슬은 없지만 볼모 대타가 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호종하는 신하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나라가 약하니 대국에 기대었고 믿었던 언덕이 힘을 잃으니 강국에 짓밣이는 현실.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주에서 일박한 원손 일행은 압록강에서 배를 탔다. 이제 건너편 강변에 배가 닿으면 이국이다. 조선 강토를 유린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러 가는 길. 원손을 호종하여 심양에 있는 신하들과 교대하러 가는 군관 유중길은 압록강 물결이 원망스러웠다.

"배라도 뒤집어 버렸으면 좋겠다."

원손을 모시고 가는 사람으로서는 불경한 생각이지만 그러한 바람마저도 압록강 물결은 수포로 돌려세웠다. 용왕은 바다만 지배해서 일까? 압록 빛 물결을 헤치고 미끄러지던 배가 위화도를 지나 애자하 하구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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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하. 현재는 애하라고 불리며 뒤에 보이는 것은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선전하는 호산장성이다. ⓒ 이정근




원손과 인평대군이 배에서 내렸다. 이제 청나라 땅이다. 원손이 청나라 땅을 밟는 순간, 조선의 세자와 왕자 그리고 세손을 포함하여 왕위계승 1.2.3.4위 모두가 적국의 수중에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의 미래는 청나라의 손아귀에 있다는 징표다.

애하를 떠난 원손 일행이 황량한 벌판을 지나 책문에 도착했다. 국경검문소다. 행차를 발견한 청나라 군사들이 책문을 닫아걸고 길을 막았다.


"조선국 원손이시다. 길을 열어라."

호종 별감이 목소리를 높였다. 망루에서 행차를 살피던 청나라 군사들이 책문을 빼꼼이 열고 나왔다.

"누구라고 했느냐?”

병졸들을 이끌고 나온 군장이 눈알을 굴리며 되물었다.

"조선국 세손이시다. 어서 문을 열어라."
"세손인지 네손인지 우리가 봐야 알것다 해. 가마 문을 열어라."

내관이 가마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들치고 가마 속을 살피던 청나라 군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조선국 원손을 조롱하는 청사라 군사들

"세손이 왜 이렇게 작아 해?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져?"
"무엄하구나. 너희들 청나라 군사들은 예의도 모른다 하더냐?"

호종 별감 김덕남이 오랜만에 청나라 군사에게 큰 소리 한 번 쳤다.

"무엄이라고라? 우리가 예의가 없다면 너희는 싸가지가 없구만. 애들아, 이 어린아이를 내리게 하고 가마를 샅샅이 뒤져라."

병졸들이 원손을 끌어내리고 가마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별감이 군장의 소매를 붙잡고 인삼 몇 뿌리를 안겨 주었다.

"진즉 이렇게 할 것이지. 조선 사람들은 눈치가 없다 해. 너희 나라 사람들이 담배다. 인삼이다. 이딴 것들을 몰래 들여오기 때문에 이런다 해.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하기 바란다 해."

헤헤거리던 군장이 책문을 열어 주었다.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온 담배가 대륙에 전파되어 청나라 조정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담배밀수를 엄단하라'는 황제의 엄명이 있었으나 담배는 청나라의 밀무역 인기 품목이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람들이 생계를 위하여 집요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치사한 놈들 같으니라고! 인삼 몇 뿌리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 청나라도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왜 조선은 청나라 앞에만 서면 작아질까?"

청나라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유가 뭘까?

유중길은 그것이 궁금했고 그것이 알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명나라는 대국이라고 배웠다. 이 세상에 명나라가 제일 큰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만주의 조그만 부족이 대국이라 자처하고 나섰으니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하늘에는 태양도 하나, 달도 하나다, 이 세상에 대국이 둘일 수 없다. 우리가 대국으로 알고 있던 명나라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면 청나라가 크긴 크나 보다. 이왕 청나라에 들어왔으니 청나라가 얼마나 큰지 속속들이 알아보리라."

유중길은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 말 타고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종족이 우리 민족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아리송했다.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스승도 없었고 서적도 없었다,

명나라를 아버지 나라로 숭상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요동성과 안시성은 물론 고구려 역사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도 불충으로 생각했고 교육자체가 없었다. 드디어 원손 일행이 봉황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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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 봉황산성이 있는 곳이다. ⓒ 이정근



"어서 오시오. 세손.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성장 호여방이 정중하게 맞이했다. 청나라 장수이지만 얼굴 윤곽으로 보아 조선 사람의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원손과 인평대군이 가마에서 내렸다.

"세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기다리시오."

원손 일행은 호여방이 지정한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석철로서는 청나라에서 첫날밤이다. 낯선 땅에서의 첫 밤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바마마가 어떻게 생기셨을까? 할바마마처럼 작게 생기셨을까? 말 타고 앞장서가던 별감처럼 의젓하게 생기셨을까?"

석철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태어나 10개월 만에 헤어져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어린 석철의 기억에 아버지의 잔상은 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만나자 마자 헤어져야 하는 가슴 아픈 이별

3일 후, 오목도의 호위를 받은 세자 일행이 봉황성에 도착했다. 말이 호위이지 호송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을 통제했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먼저 와있던 석철을 발견한 소현이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왕가의 법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돌출 행동이다. 석철을 품에 안은 소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저하! 소신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소현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석철이 큰 눈을 멀뚱거렸다. 막상 아버지의 품에 안겼으나 낯설었다. 석철에게 아버지는 생소했다. 그리운 아버지의 품이건만 찬바람이 스치고 건조했다. 푸근하고 따뜻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현이 석철을 내려놓았다.

"세자저하! 강녕하셨습니까?"

석철이 앙증맞게 절을 올렸다. 궁중의 법도에 따라 신하의 입장에서 절을 올린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의 눈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소현은 절을 마친 석철을 다시 끌어안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소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 자, 이만들 헤어져야 하오. 왔으면 보내라는 것이 황제의 명이오. 원손은 심양으로 가고 세자는 한성으로 출발하시오."

분위기를 깨며 오목도가 재촉했다. 철저하게 사무적이다. 대타 인질 원손과 대군이 온 것을 확인했으니 세자는 조선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이다. 석철이 하직 인사를 했다. 만나자 이별이다. 석철이 성 밖 언덕을 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소현은 장승처럼 서서 마음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곳 봉황성이 옛 고구려인들의 안시성이었던, 백암성이었던 그것이 소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섯 살 어린 아들을 자신의 대타로 심양에 들여보내야 하는 현실이 뼈저린 슬픔으로 가슴을 할퀴었다.
#세자 #원손 #봉황성 #원손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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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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