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그리웠던 조국인가

[역사소설 소현세자 68]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

등록 2008.07.02 14:39수정 2008.07.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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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압록강 물빛은 오리의 머리처럼 푸르다. 뒤에 보이는 것이 위화도다. ⓒ 이정근


세자 일행을 태운 배가 애하 하구를 출발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 물은 여전히 푸르다. 위화도를 비켜 세운 배가 북서풍을 타고 강심으로 미끄러졌다. 압록 빛 물빛은 예나 다름이 없었으나 소현의 소회는 달랐다. 심양으로 끌려갈 때는 절망의 빛으로 보였던 강물이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시 이 강물을 되짚어 심양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세자 일행을 태운 배가 의주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소현은 심호흡을 했다. 얼마나 맡아보고 싶었던 조국의 내음인가? 얼마나 그리웠던 조국산천인가? 감회가 전율이 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 내렸다. 의주관에서 일박한 소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로 남행이다. 세자가 의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급주마를 타고 한성에 전해졌다. 


세자가 조선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대궐은 술렁거렸다. 오랜만의 희소식이다. 나인들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내관들이 분주해졌다. 세자의 귀국은 패전 휴유증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사대부들에게 활력소가 되었다. 척화에 동조했다 하여 먼 지방에 쫒겨가 있던 파직자와 산관(散官)들이 한성으로 모여 들었다.

혜음령을 넘은 세자 일행이 벽제관에 하룻밤 묵으며 입성 채비를 갖췄다. 이윽고 행렬이 벽제관을 출발했다. 연도에 늘어선 백성들이 흐느꼈다. 기쁨과 슬픔이 범벅이 된 눈물이었다. 연서역에는 백관의 절반이 나와 세자의 귀국을 영접했다. 홍제원에는 산관과 유생들이 총 출동하여 세자의 환국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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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창덕궁 정문에서 인정전에 이르는 길목에 있다. ⓒ 이정근


세자 일행이 홍제원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승지 박노를 보내어 오목도에게 예를 갖췄다. 드디어 세자 일행이 창덕궁에 도착했다. 궐내에서 입직하는 관원들이 금천교에 도열했다. 장경문에 이른 오목도가 세자를 뒤로하고 인조와 마주 섰다. 소현은 병환에 시달리는 부왕을 앞에 두고 손 한번 잡아볼 기회가 없었다.

"밀서를 전할 것이니 좌우를 물리치시오."

오목도는 사신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호위대장이다. 일개 장수가 국왕에게 명령을 한 것이다. 인조가 시종 승지와 내관들을 물리쳤다.


"이 밀서는 황제의 친서이니 신임할 만한 내관 한 사람 이외에는 함께 뜯어보지 마시오."

오목도가 밀서를 건네주었다. 밀서를 받은 인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밀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목도가 목에 힘을 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범상한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인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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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창경궁에 있다. ⓒ 이정근


밀서 전달식이 끝났다. 비록 호위대장이지만 황제의 밀서를 가져왔으니 칙사 대접을 해야 한다. 밀서를 받은 인조는 오목도를 양화당으로 안내하고 접견했다.

"내가 병이 심하여 세자를 영영 보지 못할까 염려하였는데 황제께서 보내주셔 만나보도록 하시었으니 황감합니다."
"부자의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대인께서 주선해 주신 덕분이니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께서 왕의 병이 심하다는 얘기를 듣고 세자로 하여금 근친하도록 한 것입니다."

"황공하옵니다."

청나라가 볼모로 붙잡아 간 세자의 귀국을 허용한 것은 조선이 어여뻐서가 아니다. 인조의 환우는 구실일 뿐, 더더욱 아니다. 군사를 모으고 성곽을 쌓으며 복수의 칼을 갈던 조선의 항전 의지를 분쇄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들으니 병이 조금 나았다 하니 기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병세입니다."

공식적인 사신 영접절차가 끝나고 소현이 들어가 부왕 앞에 부복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바마마!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소서."

소현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인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소현의 등을 어루만졌다. 아버지의 체온이 전해졌다. 따뜻했다. 아버지의 체온이 등에 머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복한 소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훔쳤다.

"왜들 이러십니까? 오랜만에 만났으면 기뻐해야지…."

오목도가 끼어들었다. 부자의 해후마저도 저지시킨 것이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조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부자 상봉을 마친 소현은 종묘로 직행했다. 선대왕들에게 세자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다. 종묘 전알을 마친 소현은 오목도가 묵고 있는 남별궁을 찾았다.

"귀국을 도와주시어 고맙습니다."
"무슨 감사까지나…? 세자는 너무 지체하지 말고 돌아갈 준비를 하시오."

도착과 동시에 독촉이다. 그날 밤. 인조는 삼정승과 원임대신, 그리고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양화당으로 불러들였다.

"황제의 밀서에 대하여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고자 한다."

밀서를 꺼낸 인조는 승지 박노로 하여금 읽도록 했다.

황제의 기침소리, 뇌성벽력이 되어 조정에 떨어지다

"지난번에 내보내었던 사신 마부달과 통사 도리가 같은 병으로 죽은 것에 대하여 심양의 여러 의원들이 만독에 혐의를 두고 있다. 관원 중에 악독한 마음을 품은 간사한 자가 있거나 전쟁 중에 해를 당한 집안이 원한을 갚고자 독기를 부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특별히 이 칙서를 보내어 왕에게 알리는 바이니 왕은 상세히 살피라. 또한, 볼모로 보낸 신하의 아들들이 대부분 서출이거나 양자 아니면 친족 중의 촌수가 먼 조카들이라고 한다. 여러 신하들이 짐을 속이려 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왕은 유념하라."

승지의 낭독이 끝나자 양화당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또 한 차례의 태풍을 예고하는 밀서다. 누가 연루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고 청나라의 의혹에 책임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만독(慢毒)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심유경이 수길을 독살하였는데 그때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의정 홍서봉이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밀사로 일본에 건너간 심유경이 수길과 마주 앉아 환약을 먹었다. 괴이하게 생각한 수길이 무슨 약이냐고 물었다.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몸이 상해 병이 들었는데 이 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하다."
"나도 섬에서 돌아왔더니 기운이 없다. 그 약을 먹을 수 있겠는가?"

심유경이 약을 주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수길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먹자고 제안했다. 심유경이 혼쾌히 나누어 먹었다. 그 약은 사람의 몸을 서서히 쇠약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심유경은 다른 약을 먹어 그 약의 기운을 내리게 하였다. 그 뒤에 수길은 점점 몸이 여위고 피가 말라 죽고 말았다.

"마부달과 도리 두 사람이 같은 증세로 죽었으니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심양에 보낸 것은 과인을 속이고 황제를 속이는 일이다. 이 일은 모두 비밀로 할 일이 아닌데 비밀히 보내온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자리에 들어와 있는 대소신료들 중에도 연루자가 있다는 뜻이라 여겨집니다."

"나라에서 이미 세자를 보내었으니 조신들은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자를 보내고 적자가 없으면 첩자(妾子)를 보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대부분 다른 사람의 아들을 대신 보내었다고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인조는 대노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여 왕 자신도 몸소 세자를 내어 놓았는데 대소신료들이 적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내어 황제의 추궁을 받게 되었으니 배신감을 느꼈다.

"즉시 조사하여 보고하라."

대사간 이행원에게 엄명이 떨어졌다. 심양에 있는 홍타이지의 기침소리가 압록강을 건너며 뇌성이 되어 조정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소현세자 #인조 #오목도 #심유경 #마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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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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