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94] 안창호의 실상과 허상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8.01 12:49수정 2008.08.0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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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길림성 강연

안창호의 강연을 마련한 조선 청년 중에 김영호가 있었다. 그는 10여 년 전 조국을 떠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친구 겸 동지인 오동진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강연회를 준비했다. 특히 오동진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의 제자이기도 했으니 감동이 더 절절했다. 오동진은 대성학교 사범과 입학시험에서 안창호가 인물 심사를 어떻게 했으며, 재학 중에도 안창호가 자기에게 어떻게 대했는가를 김영호에게 들려주었다.

오동진은 스승 안창호의 뛰어난 웅변술을 칭송했다. 김영호는 안창호의 웅변 솜씨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연설을 하면 그의 유창한 언변과 화려한 제스처에,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민족적 이상향론에 감복한 아낙네들이 반지와 비녀를 뽑아 헌금을 한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호의 관심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그는 조선인들이 흔히 칭찬하는 이른바 ‘말 잘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안창호의 역사관과 운동 노선을 직접 듣고 확인하고 싶었다.

“독립이 되고 선거가 있다면 나는 안창호 선생을 대통령으로 뽑겠어.”

오동진은 순수한 청년이었다. 김영호는 오동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안창호의 시국 강연은 길림성 조양문 밖 대동공창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강연회는 작년 11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추도식을 겸해 열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길림성 3부요인과 유지들 그리고 길림성의 독립운동가들과 청년· 학생들로 강연장은 일찍부터 빈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청중이 서서 강연을 들어야 했다.


안창호의 강연 제목은 ‘조선 민족의 장래’였다. 그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인용하면서 해박한 지식을 강약 조절이 잘되는 어조로 설파했다. 처음부터 청중들은 그의 언변에 찬탄했다. 그가 민족의 출로가 무엇인지를 음성을 높여 강조할 때마다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민족적 역량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후, 이의 타개를 위해 ‘민족인격완성론’과 ‘민족경제확립론’을 내세웠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격 수양이 적은 데 이유가 있으므로 각자의 인격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수양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서로 화합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민족 경제 확립을 위해 국산품 애용과 민족 기업 육성을 강조했다. 국내에서 전개되는 물산 장려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안창호의 강연을 들으며 김영호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는 안창호의 말에서 조선이 후진국이란 말까지는 동의한다 하더라도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는 주장에는 반감이 일었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굳이 내부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당대 위정자들의 무능과 사리사욕이었지 열악한 민족성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족 경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일본은 한국의 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그들이 결심만 하면 한국의 기업은 파산할 수 있도록 법령으로 묶어 놓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 자본으로 민립대학 하나도 세우지 못하도록 철저히 억압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안창호는 만주에서도 민족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권이 없는 민족에게 어느 나라가 발전소 같은 것을 만들라고 차관을 해 주겠는가? 설령 그들이 차관을 준다고 해도 어떻게 다른 나라의 영토인 만주에 발전소를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안창호가 말하는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도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었다. 외제를 쓰느냐 국산품을 쓰느냐의 문제는 극소수 상류 계층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생존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그들이 언제 외제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지를 따져 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국산품이 아니라 지옥에서 나온 상품이더라도 돈이 없어 못 쓰는 그들에게 외제를 쓰지 말라는 말은 공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컨대 안창호의 개량주의는 독립운동을 하되 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하자는 구호나 다르지 않았다.

“조선 민족은 세계에서 정신 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때를 벗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주 독립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강연장의 기류는 안창호의 주장에 동감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안창호의 강연에는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김영호는 자기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누구의 것을 베꼈는지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또한 김영호는 안창호의 주장이 민족의 투쟁 의욕을 거세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영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력 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 투쟁의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었다. 안창호에 의하면 독립 투쟁은 없어지고 실력 양성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김영호의 질의서

김영호는 쪽지에 내키는 대로 적었다. 그의 질문서는 맨 앞의 학생을 거쳐 사회자를 통해 단상까지 전달되었다.

  1. 우리 민족이 열등하고 정신 수양이 낮다고 하셨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산업과 교육으로 실력을 배양하자고 하셨는데 왜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힌 상황에서 그것이 어느 선까지 가능하겠는지요?
  3. 우리는 영, 미의 원조를 받아 독립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들이 우리를 한 번이라도 도와준 적이 있는지요?
  4. 우리가 영국과 미국을 반드시 본받을 필요가 어디 있으며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요?

김영호는 불안한 마음으로 강연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강연자가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혹시라도 강연을 망칠까 두려워 질문서를 쓴 것을 반쯤은 후회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많은 청중들이 실망하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강연을 주도한 친구 오동진에게도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그가 성급히 질문서를 디밀은 것은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의 성격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창호가 순수했듯이 김영호의 행동에도 사심이 없었다. 그는 명망을 얻고 있는 민족 지도자가 올바른 독립 노선을 가져 주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번졌다. 질문서를 받아 읽은 안창호는 손짓으로 사회자를 불렀다.
“여기 김영호라는 사람의 서명이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가?”

사회자는 어쩔 줄 모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창호는 고개를 숙이고 질문서를 다시 읽었다. 강연회장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안창호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았는데 좀 더 연구해 봐야 할 어려운 것이라서 답변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안창호는 황망히 인사말을 하더니 강연을 끝내 버렸다. 그 날 청중들은, “도산 선생이 왜 갑자기 주접이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강연장을 빠져 나갔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사건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길림성 #안창호 #민족개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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