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의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그가 죽은 장소는 조선 독립운동의 성지 상해였다. 그는 76세의 노령까지 독립운동의 현장을 지킨 의인이었다. 그는 순수하고 온유해서 야심 있는 개화 · 계몽주의 친구들에게 이용당한 면이 있었다. 그는 총독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불현듯이 74세의 노구를 끌고 아들과 함께 상해로 망명함으로써 작위를 패대기쳐 버렸다.
그는 3·1운동에서 희생되는 평민들을 보고, 자신의 개화· 계몽 노선이 정작 나라를 위해 도움된 것이 없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계몽 단체에 관여하면서 동료들의 요구대로 독립문의 휘호를 썼고 적지 않은 재산을 내놓았지만, 결국 계몽주의자들이 이룬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위험한 항일 비밀 결사였던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를 맡았다. 사실 총독부 작위는 그 때 이미 극적으로 버린 것이었다.
그는 수없이 명멸했던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특색 있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김용한과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석동 등도 독립운동에 삶을 바침으로써 가히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가문을 이루었다. 의병장 신용우와 그의 아들 신규식,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 그리고 민필호의 사위 김준엽 등 4대 독립운동가 가문과 함께 그들은 식민지 한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농 김가진의 장례를 매우 엄숙하고도 거창하게 치렀다. 물론 그에 대한 존경과 추모가 첫째 이유였겠고, 다음으로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해에서 조선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장례 물품은 어느 하나 외상 아닌 것이 없었다.
며느리 정화는 막막했다. 그녀 부부는 살던 집을 백범의 가족에게 기꺼이 내주었다. 그녀가 다시 국내 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제 시아버지를 모신다는 기쁨과 보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도 그 중 한 이유였다. 연로한 친정아버지를 보고 싶기도 했으며, 아울러 그녀에게는 김영세라는 한 개성적인 사나이가 가슴에 간직되어 있기도 했다.
정화는 남편과 진로를 상의했다. 지난 3년 간 그들은 아버지를 모시는 일에 관심을 쏟느라고 정작 자신들의 거취는 돌보지 못했다. 이제 어른도 떠났으니 그들나름의 새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제가 친정에서 학자금과 여비를 만들 테니 우리 미국으로 유학 갑시다.”
그녀는 이승만을 생각했다. 이승만은 그녀의 시아버지와 돈독한 관계였다. 시아버지는 1904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갈 때, 그의 출국을 주선하고 여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정화 남편의 유학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에게 연락하면 그가 유학길을 주선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며칠 간 고뇌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더니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정화의 제안을 거절했다.
첫째, 고생하는 동지들을 두고 자기만 개인적 영달을 꾀할 수 없다.
둘째, 자기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셋째, 처가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당신 혼자만이라도 국내에 가서 공부를 더 할 방법을 찾아보시오.”
정화는 남편의 심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돈이 있으면 유학보다 더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일본에 대한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제가 상해에 다시 올 때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녀는 예산에 있는 친정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고는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라. 봄이 되면 쌀을 팔아서 내가 3천 원 정도를 너에게 해 주마.”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봄이 오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유학 계획이 좌절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녀는 이제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고뇌하는 정화
세월이 갈수록 친정의 가세는 기울어갔다. 아버지의 빈 자리가 그렇게 컸던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인심은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그녀는 김영세를 생각했지만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유부녀로서 그를 만날 명분이 없었다. 한껏 기대를 해 왔던 일이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니 그건 왠지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경성 인사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번 귀국 때, 크게 도와주었던 신필호 박사의 집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집을 찾아 들어갔다. 젊은 안주인이 나왔다.
“저는 정화라고 합니다. 어른들 안녕하시지요?”
“누구시더라?”
젊은 여인에게서 나온 말은 그녀를 당혹시켰다. 정화는 민망하고 무안하고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정화는 얼른 뒤돌아섰다.
‘당신의 시숙부 두 분 중 한 분(신규식)은 독립운동을 하다 얼마 전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신건식)은 지금도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몸단장 예쁘게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군요.’
젊은 여인은 맹한 얼굴로 정화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정화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과연 독립 운동이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나는 왜 상해로 갔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독립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남편을 비롯한 상해의 인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과 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 가지 명백한 결론을 얻었다.
만약 국내에 있던 어떤 이가 상해에 가서 독립지사를 찾아가 내가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을 때,
“누구시더라?”
이런 말을 할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비정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왜냐 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람들이므로 그런 말을 할 리가 결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믿었다.
결국 그녀는 돈을 모아 남편의 테러 자금을 갖고 다시 상해로 가야 된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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