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44) 존재 7

[우리 말에 마음쓰기 396] ‘­난 존재한다’, ‘단둘 사이에만 존재’ 다듬기

등록 2008.08.07 11:53수정 2008.08.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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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난 존재한다

 

.. 미지, 하고 싶은 걸 할 때 난 존재한다 ..  《김종휘-너,행복하니?》(샨티,2004) 30쪽

 

 가만히 떠올려보면, 저도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에 ‘존재’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썼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썼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존재’란 말이 우리 말을 좀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그러면 나는 어떤 말을 써야 하지?’ 하고 찬찬히 되새겨 보았고, 다른 사람들 말씨를 살피면서 하나둘 알맞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 하고 싶은 걸 할 때 난 존재한다

 │

 │→ 하고 싶은 걸 할 때 난 살아 있다

 │→ 하고 싶은 걸 할 때가 진짜 나다

 └ …

 

 철없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저는 참말 ‘말 가난이’였습니다. 제 생각과 마음과 뜻을 두루 펼치지 못하던 말 가난이. 제 줏대에 따라서 제 느낌을 차근차근 들려주지 못하는 말 가난이. 제가 보거나 듣는 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던 말 가난이. 제 눈길이 아닌 남들 눈길로, 제 속에서 샘솟는 말이 아닌 다른 사람들 말로 어설피 껍데기만 꾸미던 말 가난이.

 

 참말로 나다움을 간직하고 가꾸고 지키려면, 참으로 나라는 목숨 하나가 살아 있음을 살아숨쉼을 뽐내려면, 바로 제 말을 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닌 남들 말은 아무리 갖다가 붙여도 나다움을 보일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자면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써야지요.

 

 “하고 싶은 걸 할 때” ‘난 존재한다’고 말한 아이는, ‘난 존재한다’를 어떠한 뜻으로 말했을까요. 이 아이는 틀림없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말했습니다. 다만, 이 아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아닌 남들한테도 고스란히 건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난 존재한다’고 할 때는 어느 한 가지를 또렷하게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셈이거든요. ‘존재’라는 말은 다른 한자말과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어떤 뜻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갖가지 느낌, 그러니까 두루뭉술한 느낌을 담습니다. 철학이나 사상을 하는 이들이 ‘존재’라는 말을 쉽게 풀어내지 못하는 까닭도, 자기들부터 ‘존재’라는 말을 어느 자리에 또렷하게 어느 한 가지로 쓰는가를 못 밝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있는’지, ‘살아 있는’지, ‘살아숨쉬고 있는’지 또렷하게 말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서 있는’지, ‘멈춰 있는’지, ‘고여 있는’지, ‘휘둘리고 있는’지도 가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멍하니 있는’지, ‘즐겁게 어울리고 있는’지도 살필 수 없는 ‘존재’예요.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 사회와 문화는 겉껍데기에 치우치거나 이끌리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제대로 된 자기 모습을 내보이거나 마음껏 뽐내면서 살기보다는 남들 눈치를 살피며 삽니다. 자기 몸에 꼭 맞고 즐거운 옷을 입기보다는 남들 눈길에 마음이 가는 옷을 고르고, 남들 보기에 멋져 보이는 옷에 끄달립니다. 이런 형편에서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보여주고 내보이는 우리 말과 글을 알맞게 쓰기란 어렵겠지요. 자기 모습이 아닌 남 모습에 더 눈길이 쏠리고, 자기 마음속 목소리가 아닌 남들 목소리에 귀가 더 쫑긋한데 어찌 제 말을, 자기 말을, 자기 마음에서 울려퍼지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존재’라는 낱말은 쇠사슬입니다. 우리 발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쇠사슬입니다. 아니, 굴레입니다. 우리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굴레입니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온마음을 신나게 펼칠 너른 들판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쇠사슬이자, 우리 스스로 풀지 않는 굴레입니다. 참말로 언제까지 이런 쇠사슬과 굴레를 죄 등에 지고서 살아가려는지. 홀가분한 몸으로 단출하게 우리 삶을 가꾸면서 살갑고 반가운 말과 글을 즐기며 살아가려는지. 글쎄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ㄴ. 단둘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 우리의 인연은 어쩌면 단둘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  《강풀-순정만화 (2)》(문학세계사,2004) 299쪽

 

 “우리의 인연”은 “우리 인연”으로 다듬어 줍니다. ‘인연’을 덜어내고 “우리는 어쩌면 …”처럼 적어도 괜찮습니다.

 

 ┌ 단둘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

 │→ 단둘 사이에서만 맺어지는

 │→ 단둘 사이에서만 이어지는

 │→ 단둘 사이에서만 얽혀 있는

 └ …

 

 자기와 가깝다고 느끼는 어느 한 사람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또 내가 아는 다른 여러 사람과 자기와 가깝다고 느끼는 어느 한 사람이 저마다 다른 만남고리로 얽혀 있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만남고리를 하나도 모르지만, 모두들 이렇게든 저렇게든 이어져 있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이 만남고리가 한 자리에 모이지 않는다면 서로 어떻게 맺어져 있는지 알 수 없기도 해요.

 

 한국땅에서 몇 다리만 걸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사람들 북적이는 도심지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그저 남이 아니라 모두 ‘아는 사람’일 수 있고 ‘이웃’일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낄 뿐일 테고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8.07 11:53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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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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