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덮어야 새말이 샘솟는 세상?

[우리 말에 마음쓰기 403] ‘나눔잔치-나눔장터’와 ‘바자-바자회’

등록 2008.08.15 12:48수정 2008.08.1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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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성당 신부님한테 전화 한 통 옵니다. 성당에서 조그맣게 열어서 동네 아이들 쉼터로 꾸리고 있는 공부방 살림에 보태고자 ‘바자회’를 마련해 보려고 하는데, 신부님 당신이 듣기에도 ‘바자’라는 말이 뜻이 잘 와닿지 않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그냥 영어로만 되어 있는데, 마땅한 다른 이름이 없겠느냐고 물으십니다.

 

 ┌ 바자회(bazar會) = 바자

 └ 바자(bazar) : 공공 또는 사회사업의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벌이는 시장. ‘자선장’, ‘자선 장터’, ‘자선 특매장’, ‘특매장’으로 순화

 

 손전화로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생각합니다. 나이든 분들, 또는 자원봉사 일을 오래 해 오신 분들은 으레 ‘바자-바자회’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모른다고 해도 씁니다. 예부터 썼고, 자기한테 익숙한 말로 이름을 붙여서 자리를 마련해야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니까요.

 

 국어사전을 뒤적여 봅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자선 장터’나 ‘특매장’으로 고쳐쓰라고 나오는데, 이와 같은 말도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자선(慈善)]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

 

 ‘자선’이라는 낱말은 썩 내키지 않습니다. 집안이 가난한 아이들이 갈 데가 없고 놀 곳이 없어서 헤맬 때, 종교교육하고는 아무런 끈이 없이 고즈넉한 쉼터이자 공부도 하고 동무들과 어울리기도 하는 작은 ‘배움터’ 살림을 거드는 일이지만,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자리”라고 하기는 알맞지 않습니다.

 

 ┌ 나눔잔치

 └ 나눔장터

 

 어렵지 않게 두 가지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나눔잔치’. 또 하나는 ‘나눔장터’. ‘잔치’는 먹고 놀고 마시는 자리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 가운데 ‘핸드볼 큰잔치’가 있습니다. 크게 벌이는 행사를 일컬을 때 ‘큰잔치’라고 씁니다.

 

마을에서 조촐하게 꾸리는 행사를 일컬을 때에는 ‘작은잔치’라고 합니다. 어떤 행사 첫머리를 꾸밀 때에는 ‘여는잔치’이고, 마지막을 꾸밀 때에는 ‘닫는잔치’입니다. 예순잔치와 일흔잔치와 돌잔치가 있고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기리는 난날잔치나 생일잔치가 있어요.

 

 살림이 어려운 사람이나 모임을 돕는다고 할 때에는, ‘나한테 조금 더 있는 무엇인가를 떼어내어 나누어 주는’ 일이 되니, 이 모습 그대로 ‘나눔’이라는 말을 빌려서 ‘나눔잔치’라고 새 낱말을 엮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 ‘나눔잔치’는 제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일찍부터 무척 많은 분들과 꽤 많은 모임에서 즐겨쓰고 있어요.

 

 한편,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를 도드라지게 내보이려고 할 때에는 ‘나눔장터’라는 말을 씁니다. 이 ‘나눔장터’라는 말은 동사무소나 구청에서도 쓰는 낱말입니다. 여느 사람들 모임에서도 쓰고 공무원도 쓰는 낱말입니다. 시민단체이든 관변단체이든 ‘나눔장터’라는 말을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기쁘게 쓰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은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과 모임이 즐겨쓰고 있는 ‘나눔잔치’요 ‘나눔장터’이지만, 이 두 가지 낱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는 못 실립니다. 두 낱말을 우리 나라에서 써 온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 이 두 낱말은 어이된 셈인지 올림말로도, 또 ‘바자회를 순화해서 쓸 말’로도 실리지 않습니다.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 사랑잔치

 └ 사랑장터

 

 굳이 국어사전에 매일 까닭은 없으니, 국어사전에 실리거나 말거나 우리들이 즐겁게 쓰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어학자께서 보시기에 왜 띄어쓰기를 안 하느냐고 손가락질을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 나름대로 ‘사랑잔치’나 ‘사랑장터’ 같은 새 낱말을 지어서 써도 괜찮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나눔, 이 세 가지는 우리 삶에서 그지없이 아름답고 살가운 마음결입니다. 이 세 마음결을 찬찬히 헤아리고 곱씹고 껴안으면, 우리 삶을 가꾸고 우리 마음을 쓰다듬으며 우리 넋을 따뜻하게 덥힐 알맞춤한 낱말 하나 여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모임이나 예배당이나 절집에서 꾸리는 잔치나 장터라 하면, ‘믿음잔치’나 ‘믿음장터’ 같은 말을 써 보아도 어울립니다. ‘사랑잔치-믿음잔치-나눔잔치’ 세 가지를 고루 쓰면서, 세 가지 어울림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사랑잔치에서는 거저로 주는 물품을 놓고, 믿음잔치에서는 지키는 사람이 없이 물품과 저금통만 놓고, 나눔잔치에서는 누구나 거리낌없이 물품을 가져와서 사고파는 자리로 마련해도 됩니다.

 

 마음을 열면 생각이 열립니다. 생각을 열면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이 보이면 우리 자신과 둘레 사람들 삶을 느낄 수 있고, 나와 이웃 삶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가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면 좋은가를 찾아내어 알뜰히 추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삶에서 나오는 말, 삶에서 샘솟는 말, 삶에서 길어내는 말입니다. 먼저 삶을 여미거나 가꾸려는 매무새를 다독여 주고, 다독이거나 여미어 낸 삶을 꾸밈없이 말로 풀어 보이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8.15 12:4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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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우리말 #우리 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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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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