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는 신문에서 작은 기사 하나를 읽고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기사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담고 있었다. 옹주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고종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딸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가슴이 아팠다.
제국주의에 파괴된 여인
'옹주'는 왕과 궁녀 사이에서 낳은 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작호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1912년, 경술국치 경과 2년이었고 그때 아버지 고종의 나이는 환갑이었다. 하지만 옹주의 탄생과 조선 왕의 환갑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명치천황의 황후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제는 조선왕실의 자손이 하나 더 느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 살에 주어지는 옹주 작호는 물론 왕의 정식 자녀로서의 입적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연로한 아버지는 어린 딸을 가여워했다. 그래서 왕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즉조당에 유아원을 만들게 했다. 망국의 왕이라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었나 보았다. 하지만 유아원의 교사를 한국인만으로 채용할 권한까지는 왕에게 없었다. 그래서 유아원의 교사로 일본인이 주로 채용되었다.
유아원에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실 자제 10여 명이 다니게 되었다. 왕은 아침마다 즉조당에 들러서 어린 것의 재롱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왕은 어느 날 일본 총독을 덕수궁으로 초빙한다. 그러고는 총독을 왕궁 유아원으로 데려간다. 왕은 노래하고 유희하는 어린 것들의 앙증맞은 모습을 총독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늙은 왕은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재롱을 떨었다. 그러더니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와 총독에게 인사시켰다. 총독은 어린 것을 안아 올렸다. 왕의 어린 딸은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총독은 본국 궁내성으로 전보를 쳐 덕혜옹주의 입적 문제를 서두르라고 한다. 다음 해 총독은 덕혜옹주를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히노데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소학교를 마친 옹주는 일본에 있는 왕실 학습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주변 눈치 보기에 익숙해진 소녀는 그 때 벌써 자신의 삶이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놀음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았음일까? 소녀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어린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빠 영친왕이 일본에 간 것은 일종의 인질이었고 그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도 강제라는 것을 어린 것은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왕 역시 딸을 떠나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비가 한 일은 다소 옹졸했다. 왕은 시종 김황진에게 아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시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시종의 사내 조카 중에서 하나를 양자로 들여 놓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옹주와 정혼시켜서 옹주의 일본행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종 김황진은 왕 대신 총독부 경무부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종은 이듬해 봄 덕수궁에서 독살되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동경역으로 나가 덕혜옹주를 마중한다.
"긴 여행에 많이 피로하시지요?"
옹주는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검게 두드러진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참 예민한 나이에 그녀는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방자는 덜컥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5년, 옹주의 나이 17세 때에 그녀의 생모 양씨가 유암으로 죽었다. 옹주는 순종이 죽었을 때 한번 고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옹주는 어머니도 못 보고 강제로 일본에 돌아갔었다. 이번에는 아예 옹주의 귀국 자체가 빨리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옹주는 도일 이후 생전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옹주는 아예 말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면서 낮에는 누워만 있었고, 밤이 되면 몽유병 환자가 되어 슈미즈 차림으로 정원을 거닐게 되었다. 그녀의 병명은 신경쇠약이나 몽유병보다도 더 무서운 조발성 치매로 진단되었다. 끝없이 입원과 요양 생활이 반복되었다.
대마도주 종 백작은 난데없이 조선 왕의 서녀인 덕혜옹주와 결혼하라는 지시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게 된다. 조선의 왕가에서도 우선 병을 치료하고 난 후 결혼해야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 백작과 덕혜옹주의 결혼은 일본 조정의 스케줄대로 강행된다. 두 젊은이가 서로 사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얼마 후 덕혜옹주는 자신을 닮은 딸을 낳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정혜라고 지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동생 이름 같다고 해서 좋아했다. 그러나 그 딸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가다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때 한국의 신문들이 그 자살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는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기생이 온천에 가서 자살한 사건에는 허구를 붙여 대서특필했던 신문들이 이 왕손녀의 자살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왕손녀의 자살에는 식민지 통치의 비인간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조선 동아를 비롯한 모든 신문들은 이를 외면해 버렸다.
덕혜옹주의 병은 낫지 않았다. 조국이 해방된 1953년 옹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제로 결혼하고 비밀리에 이혼 당한 그녀는 의지가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은 그녀의 귀국을 허용한다. 그녀의 귀국을 반긴 이는 창경궁 낙선재 윤대비와 어려서 젖을 물려준 유모 변씨였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옹주는 37년 전 유모 변씨마저 알아볼 리 없었다. 그녀는 서울대병원의 병실에서 꼬박 10년을 더 지내야 했다. 계절의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그녀는 1989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게 된다.
삿포로에 간 조순호
삿포로는 일본에서 가장 왜색이 적은 도시였다. 삿포로는 서양 풍물을 많이 흉내내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서양을 동경하기로 아시아 첫째인 일본은 토착 원주민인 아이누 족을 제압하고 뒤늦게 홋카이도 개발에 착수했다. 그들은 도청 건물을 지으며 미국 매사추세츠 의사당을 그대로 모방했다. 이 도시에는 동상과 시계탑과 붉은 벽돌 건물이 유달리 많았다. 메이지 유신 때에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진 삿포로는 일본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에 속했다.
하지만 조순호는 그런 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공원의 전망대나 유람선이 있는 호수 같은 데에도 흥미가 없었다. 유명하다는 조잔케이 온천 같은 데에는 더욱 관심이 없었다. 삿포로는 연간 강설량이 500미리 정도나 되는 도시였다. 그녀는 이따금 홋카이도의 설경에 매료되었으며 차가운 공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녀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 재래시장 하나를 알면 되었고, 커피를 향 좋게 만드는 집을 둘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녀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 잔을 들고 눈 덮인 산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일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겼다. 그녀는 유달리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인 학생들은 그녀에게 친절했고, 일본인 교수들 역시 그녀를 범상히 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기품 있는 용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예의 바른 태도와 단정하고 세련된 옷맵시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한국인이라고 해서 달리 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녀는 지난 가을 와다 츠네이츠라는 한 일본인 청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출국 신고를 할 때 그녀에게 수작을 거는 일본인 관리에게 싸늘하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여권 기록이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여권으로 그녀는 한 달 이상 일본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처음 그녀가 간 곳은 오타루에 있는 법무사무실이었다. 변호사는 금테 안경을 쓴 사람이었는데 얼굴이 작으면서도 노랗게 번들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오래 앉아 얘기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은 내일 찾아보기로 하고 대신 어서 도케이다이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싫은 것을 보면 커피가 마시고 싶어 조급해지는 약간 특이한 습성이 있었다. 커피점 주변은 라일락과 아카시아 가로수 아래 다채로운 풀과 꽃이 있었고 잘 정돈된 잔디밭이 있었다. 역시 그 동네에도 붉은 벽돌 건물이 많았다. 그녀는 커피 잔을 놓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단층 건물에 눈길이 멎었다. 1층에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이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신 후 법률사무소 쪽으로 가려고 길을 건넜다.(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3부작 대하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김갑수는 최근 독서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장편소설 <500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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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 101] 덕혜옹주의 비극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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