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쿠바에서 한국인 실종?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해 편 8- 쿠바 ⑧]

등록 2008.08.27 08:27수정 2008.08.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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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길을 달리는 동안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야 서로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다. 준호를 만난 건 행운이다. ⓒ 문종성


"양준호! 어디 있는 거야? 준호야!"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지끈지끈거려왔다. 햇살에 짓이긴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게 패어졌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전까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준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교차로가 없는 일직선 도로에서 말이다. 교차로가 없으니 다른 길로 빠져나갈 가능성은 아예 없었고, 내 뒤를 쫓아오던 녀석이 갑자기 핸들을 돌려 반대편으로 갈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이봐요, 혹시 노란색 져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던…, 뭐냐 그 뚱뚱한 한국청년… 뒤에 짐 가득 실은… 아무튼 그렇게 생긴 녀석 못 봤나요?"

급한 마음에 손짓발짓 스페인어·영어를 섞은 '가족오락관'이 되어 운전자들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이 단호했다. "노(No)!"

'노'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를 앞서간 것도 아니고, 내 뒤에서 오는 차량의 운전자들도 죄다 못 봤다니 그럼 중간에서 하늘로 붕 뜨거나 땅으로 푹 꺼졌단 말인가?

무더위에 하루 종일 달린 탓에 몸도 마음도 '메롱' 상태였다. 호흡을 제대로 가다듬지도 못하고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갔다. 하지만 한참을 내려가도 준호는 보이지 않았다. 애타게 이름을 불러가며 사방팔방 정신없이 살펴보았지만 도로 위에 남겨진 건 흔적 없는 실바람과 대답없는 메아리 뿐이었다.

'이 녀석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나? 일단 준호 부모님께 먼저 전화로 사실을 알려?'


나를 믿고 아들을 보낸 준호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락도 전혀 되지 않는 데다가 자식 보내놓고 걱정 많이 하실 텐데 타국에서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급하게 도리질을 하고, 대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니 절규했다.

"양준호! 너 어디 있어?"

쿠바에서 한국인 실종? 아아, 준호야!

오늘 아침 홰 치던 닭의 울음소리를 자명종 삼아 새벽 일찍 일어났다. 텐트를 개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세면하고 나서 와냐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맛있게 먹기까지,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오늘은 둘 다 작정하고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 시신이 안치됐다는 산타클라라까지 죽을 고생으로 달려가기로 약속했다. 120㎞ 되는 거리였다. 나로선 해볼 만한 거리지만 준호에겐 실로 거대한 벽이었다. 그에게 '120'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온 적이 또 있었을까?

나그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준 와냐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이제 막 동 튼 길 위를 시원하게 달려갔다. 다른 때보다 수면이 부족했던 탓에 몸은 무거웠지만 새벽을 달린다는 상쾌함에 어느덧 페달을 밟는 발은 가벼워졌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터로 향하며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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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육(?) 샌드위치 맛이 완전 수육이다. 삶은 돼지고기를 빵에 넣고 짭짤한 새우소스로 간을 맞추면 넘버원 샌드위치. 가격은 개당 5페소로 1CUC에 5개 정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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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식 피자 비록 보기엔 볼품없어 보여도 맛은 생각보다 괜찮다. 얼마나 치즈를 많이 넣느냐, 기호에 따라 햄이나 버섯 등의 토핑을 뿌리느냐에 따라 맛은 많이 달라진다. 개당 5페소. ⓒ 문종성


준호도 열심히 달렸다. 약간 오버한다 싶었다. 예기치 않게 나를 앞질러 간 것이다.

"120㎞, 까짓 거 해보는 거죠. 형, 그리고 오늘이 13일의 금요일이에요. 어쨌거나 파이팅!"

녀석아, 이제 겨우 10㎞ 지났다. 제발 중간에 거품 물고 쓰러지지나 말아라. 유달리 자신감이 넘치는 준호의 웃음이 머지않아 폭염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두른 탓에 오전에 두 개의 마을을 지나칠 수 있었다. 아침은 빵에 계란을 넣은 미니 샌드위치를 먹었다. 낮에는 피자 한 조각으로 때우고, 또 다음 도시에서 삶은 돼지고기를 넣은 이른바 '수육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낮이 되자 준호는 이미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하얗던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빨갛게 익었다. 지쳐 있었다. 몸이 지치니 감정이 컨트롤이 되지 않나 보다. 마지못해 식사를 대충 끝낸 얼굴이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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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소짜리 주스를 마시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무척 덥고, 갈증이 나기 때문에 한 번 가면 둘이 10잔 정도는 마셔준다. ⓒ 문종성


"형, 산타클라라까지 몇 km 남았어요?"

이 질문만 하루 내내 열 번은 넘게 한 듯 싶었다. 80·60·30km….

내가 남은 거리를 알려줄 때마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이 미안하지만 나로선 어찌나 측은하면서도 재밌던지. 기왕 고생하러 나왔는데 끝까지 인내해 보라는 말을 마음으로 전달했다.

"힘들면 더 쉬었다 가도 돼요."
"아니에요, 형. 우리 계속 가요."

살짝 엉성한 한국말이지만, 결의는 대단해 보였다. 과감하게 시련에 맞부딪히려는 그의 기특한 의지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40℃에 이르는 더위에 우리는 휴식 시간을 평소보다 더 오래잡고 가는 곳곳마다 1페소짜리 주스를 사 마셨다. 하루 동안 스무 잔이 훨씬 넘도록. 미치도록.

후들후들 휘청휘청

산도 아닌 작은 언덕을 오르는 데에도 준호는 굉장히 힘에 부쳐했다. 그리고 가끔 분을 못이기기도 했다. 그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깝고도 슬픈 자아상을 위로해 주는 감정의 배설일지 모른다.

출발 12시간 만인 오후 6시쯤 산타클라라 도착 직전, 둘 다 완전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나도 힘들긴 했지만 준호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뻘겋다 못해 시커멓게 익은 그의 다리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쓰려왔다.

신념은 좋다. 하지만 고집은 재고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의욕대로만 하다간 언제 쓰러질지 모를 녀석이었다. 준호의 얼굴은 보기도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페달조차 제대로 밟지를 못해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준호 때문에 일정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숙소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 짜내 봅시다."

준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땀으로 수분이 다 배출되어 눈물도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서운할 만 싶었다. 그것이 '왜'인지 대상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충분히 서러울 수 있는 순간이다.

산타클라라의 저무는 해를 등지고 우리는 숙소를 향한 마지막 언덕을 넘고 있었다. 준호 뒤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던 나는 이제 앞질러 가서 리드를 해야 했다. 먼저 언덕 끝까지 올라가 현지인들에게 간단히 길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뒤를 돌아보니 준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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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중학생들 낯선 자전거 여행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니...열광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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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 산만하지 않고 제법 단아하게 열을 지어 포즈를 취하는 쿠바 청소년들. 같은 또래 중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그래도 이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행복한 편이다. ⓒ 문종성


언덕 아래 우리가 거리를 넓혀가던 지점으로 내려가 이 사람 저 사람 다 붙잡고 준호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스무살이긴 했지만 해외여행은 더구나 자전거 여행은 처음인 녀석이었기에 내 마음은 자식 잃어버린 부모 못지않게 타들어갔다. 그러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돈 많은 한국인인 걸 알고 납치? 그럴 리 없어. 아님 사고? 설마…. 목격자가 없는데. 그러니까 아침에 우스갯소리로 넘긴 오늘이 6월 13일, 금요일. 설마 13일의…금요일?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종이란 말이 이렇게 피부로 가깝게 다가와 본 적이 없었다. 전신에 밀려오는 극도의 피로감. 20여 분이 흐르도록 난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준호의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렇게 햇살이 서편 하늘에 거의 다 꺾일 때쯤이었을까.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나를 부르는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익숙한 파동이 진동하고 시선을 돌려보니 이런 확!. 저녁 어스름이 내리 깔린 도로 위에 언뜻 비친 '저팔계'의 형체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걱정이 되어서 화가 나기보단 감사했다.

아쭈, 실실 쪼개? 근데 웃음이 나오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형,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

준호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사라진 연유에 대해 조근조근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태세였지만 일단 숙소 잡는 게 급선무였다.

아무튼 만나기야 한 까닭에 허탈하게 웃자니 준호도 겸연쩍었던지 따라 웃는다. 땀과 먼지로 얼룩져진 준호 눈가에 유독 선명한 줄기 하나를 보자니 고생도 참 고생이다 싶다. 우리는 추스를 겨를도 없이 숙소를 찾아 시세보다 33%(아바나를 제외하고 쿠바 전역에서 우린 2인 15CUC를 지불했다. 이 곳만 20CUC)나 비싼 가격을 부르는 주인의 어설픈 연기를 모른 척 눈 감아주고는 방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저녁식사를 위해 준호를 두고 혼자 쇼핑을 했다. 준호는 배가 고픈 상태에서도 이 여행의 눈에 보이는 효과인 '다이어트'라는 당면과제가 있었으므로 밥을 참고 음료수만 마시기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도 음식을 먹는 건 어쩐지 동업자 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아 같이 음료수로 허기를 때웠다.

중노동을 방불케 한 라이딩을 하고 나서 먹는 같잖은 저녁 식사였지만 너무 지쳐서 그랬던 걸까. 서로가 배고프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준호는 살이 찐다며 극구 먹지 않겠다던 내게로 밀어낸 아이스크림을 다시 제 쪽으로 슬쩍 잡아당겨 몇 숟가락 떠먹는다. 그리고 나서 수저를 잠시 내려놓고 오늘 이러난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그의 얘기인 즉, 내가 먼저 언덕을 앞서 나갈 때였다. 이미 죽을 만큼 달려왔는데 마지막 언덕을 보고 있자니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처럼 그만 숨이 턱 막혀오더라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쳤고, 물은 다 마셔버려 목은 타고…. 이대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판단, '에라, 모르겠다' 다 포기하고 길 옆 버스정류장으로 들어갔단다. 그래놓고 보니 자신의 처지가 마냥 서글퍼 급기야 펑펑 울어버렸다고.

녀석은 얼마나 서러웠는지 울다 지쳐 이젠 아예 자전거도 뉘어버리고 대자로 누워 자버렸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자기를 찾고있는 내가 걱정이 되어 '아차' 싶어 현지인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급하게 자기를 찾는 형이 혼비백산해 아까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단다.

결국 준호는 길 옆 버스 정류장에서 나무에 가려진 채로 세상모르게 잠을 잤으니 내 시선에 띄지 않았던 거고, 뒤에 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참 팔자 좋은 소리였다.

샤워를 하고 가뿐한 몸이 된 준호는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경직된 안면 근육을 풀어 웃음꽃을 피워냈다. 솔직히 초행길이라는 이유로 적잖이 사람 힘들게 하고 때론 놀래켜 놓고도 실실 쪼개는 밉상이란, '아휴~'.

그런데 나도 따라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다시 찾은 내 양심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녀석을 잃어버림으로써 다시 한 번 내 책임과 역할에 대한 의식을 선명히 각인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 또 이러면 아주 그냥 혼내줄테닷!'

준호에게는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다. 다시 지도를 보고 루트 및 일정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아직 남은 일정이 많은 만큼 이제부턴 철저히 우리가 아닌 준호 중심으로 계획을 짜기로 합의했다. 근데 이 녀석, 가만 보면 자존심 세면서도 은근히 잘 운다. 다음엔 또 무슨 일로 울게 될까? 녀석의 눈물이 마음의 키를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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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 표지판 산타클라라에 다가갈수록 혁명의 영웅 체게바라 사진이 도로에 나오는 빈도수가 늘어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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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또 달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 길이 끝날 것이다. 그것을 믿고 또 페달을 밟는다. ⓒ 문종성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세계일주 #쿠바 #문종성 #자전거여행 #체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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