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한 번 기똥차게 훔쳐가 보시게!"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 해 편 9 - 쿠바 ⑨] 체 게바라 동상을 지나 트리니다드로

등록 2008.09.01 15:45수정 2008.09.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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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는 길에서 느끼는 무한한 자유로움. ⓒ 문종성

▲ 자전거 여행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는 길에서 느끼는 무한한 자유로움. ⓒ 문종성

 

"트리니다드 가는 버스는 11시 단 한 번 뿐이라네."

"맙소사! 지금이 10시 10분인데."

 

6월 14일. 아침 식사를 라면으로 해결하려고 부엌에서 물을 끓이는데 숙박주인인 조지가 차 시간 정보를 알려줬다. 트리니다드로 가는 버스가 하루 중 오전에 단 한 번 뿐이란다. 시간이 없었다. 당초 계획했던 체 게바라 동상(Monumento Ernesto Che Guevara)을 보고 터미널 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거폐스러운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방금 전까지 굼벵이 모드로 여유를 부리던 준호를 채근했다. 식사는 이미 포기한 상태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좌우하지만 속도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좌우한다. 우리는 짐을 바리바리 싸 자전거에 매달고는 마운드 위에서 썩소 한 번 날려주던 선동열 광속구 모드로 달려갔다. 공원 오르막까지 단 한 번 쉼도 없이 페달을 밟아 헌연히 플라자에 들어섰다. 멀리서 체 게바라의 위풍당당한 동상이 보이고,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우선 자전거를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두고 잠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자전거는 시선의 방해가 없는 기념관 아래 도로 한복판 사람들의 왕래가 비교적 뜸한 곳에 세워 두었다. 바로 앞이라 눈에도 잘 띄어 수시체크가 가능하고, 사람들도 거의 없으니 무척 안전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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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동상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 문종성

▲ 체 게바라 동상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 문종성

산타클라라(Santa Clara)는 체 게바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이미 여러 게릴라 전에서 전과를 올린 체(Che)는 다시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한다. 그러다 1967년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조직은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체'의 죽음에 대한 증명을 위해 손목은 이미 잘려나갔고, 그 상태로 유기된 유해가 사망 30년 후에 발굴되어 조국 아르헨티나가 아닌 그의 혁명의 고향 쿠바로 송환되었다. 그곳이 바로 여기 산타클라라다.

 

C, Che Guevara : un

H, Hombre que hizo

E, El camino al andar.

 

민중의 편에서 사회 개혁을 위해 투신할 수 있었던 용기와 소수의 정예부대로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전투에서 성과를 올린 리더십. 거기에 지도자의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변함없는 혁명에 대한 신념.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그의 동상 아래 적힌 문구이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쿠바의 어린이들은 이렇게 외친다. "Seremos como El Che(우리는 '체'처럼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에 쫓기던 터라 파란만장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그의 인생을 오래도록 감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미 그의 평전을 읽었기에 그의 동상만 봐도 혁명에 대한 그의 팔딱거리는 심장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우린 딱 개인 사진 한 장, 그리고 체 게바라 동상과 벽면 사진 각 한 장, 기타 사진 한 장, 이렇게 겨우 5장만 찍고 기념물에서 내려왔다. 버스 시간 때문에 속전속결로 끝냈으며 그 사이 사진 찍을 때마다 자전거를 체크한 건 물론이었다. 그런데 기념으로 남길만한 사진 몇 장 찍고 자전거를 세워둔 자리에 후딱 와 보니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장 위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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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기념공원 전경 바로 사진 찍은 위치에 자전거를 세워 두었었다. ⓒ 문종성

▲ 체 게바라 기념공원 전경 바로 사진 찍은 위치에 자전거를 세워 두었었다. ⓒ 문종성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 사라진 장면을 목격했다', 이 때 가해지는 충격은 실제적으로도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동공이 확장되며, 근육은 경직되고, 혈맥이 뛰노는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금세 누군가 안장 위에 놓아둔 장갑을 훔쳐간 것이었다. 혹시 잘못 뒀나 여기저기 뒤져 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대단한 배짱이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사람들 눈에 훤히 띄는 곳에서 장갑을 슬쩍하다니. 하긴 들키면 모른다고 실수였다고 '당신 장갑이 왜 내 손에 있지?'하면서 둘러 댈 테니 배짱이라고 보기도 어렵겠다.

 

온두라스 국경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었다. 바로 1m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장갑은 안장 위에 올려놓고서 잠시 이메일 체크만 하고 일어섰더니 귀신같이 장갑이 사라졌었다. 내 바로 맞은 편 그늘 아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었지만 모두들 침묵 속에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눈보다 손이 더 빠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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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쿠바 어디를 가나 체 게바라와 관련한 기념품은 손쉽게 구할 수 있다. ⓒ 문종성

▲ 기념품 쿠바 어디를 가나 체 게바라와 관련한 기념품은 손쉽게 구할 수 있다. ⓒ 문종성

 

처음 도난을 당했을 때는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무척 아쉬워했었다. 회복불가의 자료들, 회복부담의 가격들. 그런데 그 도둑놈들의 만행에 길길이 날뛰며 눈물 쏙 빼던 날 선 감정이 몇 번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무뎌졌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주 변태심보가 되어 버렸다. 황당하겠지만 은근히 스릴 있으면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어디 한 번 기똥차게 훔쳐가 보시게 도둑 양반! 훔치면 네 것이요, 못 훔치면 내 것이라네!"

 

장갑도 그렇다. 물론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봤을 땐 훔쳐간 사람이 나쁜 거지만 탐나는 물건만 보면 사고체계가 급변하여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하려는 그들의 습성을 알면서도 눈에 띄는 곳에 둔 내 잘못이 첫째인 것이다. 이미 예견되지 않았던가. 내 장갑은 그 전에도 현지인들이 몇 번이나 달라고 떼를 쓰던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다.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그들에게는 무척 실용적인 것이니까. 게다가 그들 수입으로는 쉽게 감당이 안 되는 가격이기에 맘먹고 노릴 만도 했다.

 

난 이제 장갑 없이 쿠바 횡단을 마쳐야만 한다. 준호? 이 친구도 이미 장갑을 잃어버려 내 여분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정말 눈곱만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야릇한 감정이다. 그냥 그 도둑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너 그냥 가져. 잘 써." 인정받을만한 스피드를 갖춘 그에게 하는 말이지만 뒤집어 보면 얼뜬 나의 판단력을 힐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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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줄 정해진 날짜에 배급을 받기 위해 줄 선 시민들. 중소 도시나 시골 지역은 여전히 확고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으므로 먹고 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대해 크게 불만을 터트리지 않는다. 내가 가난하지만 주변 이웃 모두 나와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야금야금 정부 재정을 뒷간으로 몰래 빼돌려 개인 부를 축적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아직 대부분의 지역은 마을 단위로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 ⓒ 문종성

▲ 배급줄 정해진 날짜에 배급을 받기 위해 줄 선 시민들. 중소 도시나 시골 지역은 여전히 확고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으므로 먹고 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대해 크게 불만을 터트리지 않는다. 내가 가난하지만 주변 이웃 모두 나와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야금야금 정부 재정을 뒷간으로 몰래 빼돌려 개인 부를 축적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아직 대부분의 지역은 마을 단위로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 ⓒ 문종성

 

어쨌든 그렇다 해도 낙심이 파고들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미 시간은 45분. 급기야 준호의 자전거 체인이 빠져 버렸다. 삶이 늘 그렇지만 꼭 이럴 때 병목현상이 나타난다. 상황을 볼 틈도 없었다. 무조건 달려가서 만지작대어 고쳤다. 그리고 다시 맹렬한 기세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11시를 5분 남겨놓고 도착할 수 있었다.

 

"허허, 트리니다드 가는 버스는 11시 20분에 있답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온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아직 20분이나 남았던 건가. 정보의 힘으로 우리의 판단을 쥐락펴락한 숙박집 쥔장 한 마디에 우린 원치않은 날쌘돌이가 된 것이다. 한숨 돌리긴 했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조금 더 여유있게 체 게바라 동상을 관람했다면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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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증 이것이 있어야만 나라에서 주는 배급물을 아주 싼 가격에 받아갈 수 있다. 정해진 배급량보다 더 가져가려면 가격은 굉장히 비싸진다. ⓒ 문종성

▲ 배급증 이것이 있어야만 나라에서 주는 배급물을 아주 싼 가격에 받아갈 수 있다. 정해진 배급량보다 더 가져가려면 가격은 굉장히 비싸진다. ⓒ 문종성

 

트리니다드(Trinidad)는 쿠바 중남부에 위치한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관광도시다. 지난 여정과 특히 어제 엄청나게 고생한 준호를 위로하기 위해 쿠바 일정 중 단 한 번 만 버스를 타고 트리니다드로 향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다시 메인도로(Autopista Nacional)로 나가기 전에 나의 몸과 마음에게 주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트리니다드행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기세 좋은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트리니다드, 내 이곳에서 반드시 에너지 과다 분비증을 얻고 떠나리라!"

 

Revolutions rarely, if ever, emerge fully ripe, and not all their details are scientifically foreseen. They are products of passion, of improvisation by human beings in their struggle for social change, and are never perfect. Our revolution was no exception."

- Ernesto 'Che' Guevara, 1961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혁명은 완전히 준비가 다 되는 경우는 드물고, 그 세부사항 전부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산되는 열정의 산물이어서,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우리의 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 체 게바라, 1961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2008.09.01 15:4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체게바라 #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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