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임시정부 '장사'에서 다시 뭉치다

깁갑수 식민지역사팩션(118회)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9.19 08:14수정 2008.09.1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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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호를 생각하며 그는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김문수는 얼어붙은 구둣발을 겨우 떼어 무릎을 꿇어 고쳐 앉았다. 정강이가 송곳으로 쑤시는 듯이 아팠다. 모두들 졸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내는 일은 죽음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그는 이 밤을 얼어 죽지 않고 견뎌낸다면 아무것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이 50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임을 깨달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벅지 아래로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야영대의 순찰을 시작했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었다. 저 별을 다 세기 전, 필경 태양과 함께 아침이 오고야 말 것이었다. 그는 조국에 있는 삼촌을 생각해 보았다. 아리랑고개의 집 대청에서 비분강개하고 앉아 있을 삼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으로 그는 조순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조순호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으로 그에게 간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 세상의 고통과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여자 같았다. 그녀와 만나 따뜻한 차 한 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될 수 있을는지? 그는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마침내 동녘이 트이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희망을 알려주는 빛줄기였다. 그들은 다시 살아났다는 감동과 희열에 들떠 비틀거리면서나마 몸을 일으켜 보았다. 눈부신 햇살은 하얀 설원 위에서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광채를 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독립군들이 일어나 눈 위에 긴 그림자를 끌며 모여들었다. 그 많은 목숨들이 죽음보다 무서운 혹한의 밤을 무사히 견디고 다시 꿈틀거린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었다.

해가 높아졌을 때,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한인마을을 발견했다. 독립군에게 두부탕을 곧잘 만들어 준다는 마을이었다. 마을의 한인들은 독립군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돼지기름에 콩 두부를 넣어 끓인 두부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문수는 남아 있는 돈으로 술과 담배를 마련해 대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너같이 곱고 품위 있게 사는 여자가 나는 싫어!

병원을 다시 찾아온 나민혜를 보고 조순호는 몹시 놀랐다. 나민혜는 손을 떨었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표정을 잃어버린 여인이 되어 있었다. 갈수록 걸음도 어려워지고 혀가 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있었다.

나민혜는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조순호에게 말했다.
"더 혀가 굳어지면 너에게 말을 못할까 두려워져서 왔어."
나민혜를 보는 조순호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 있었다.
"지난 번 보니까, 너는 아직도 김문수 씨를 생각하고 있더구나."
조순호는 나민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너한테 큰 죄를 지었어."

나민혜는 절에 들어가 살 예정이라고 했다. 가기 전에 고백할 것이 있어 왔다는 것이었다. 나민혜는 조순호에게 자신과 김문수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김문수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었는데, 여러 남자를 겪어 보니 그게 아니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김문수가 자기가 아닌 조순호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이유 없는 오기가 발동했다고 고백했다. 나민혜는 자기가 김문수에 대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소상히 밝혔다.

두서없이 말을 마친 나민혜는 거칠게 일어서더니 갑자기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너 같이 곱고 품위 있게 사는 여자가 나는 싫어."

조순호는 나민혜가 가자마자 병원 문을 닫았다. 충격으로 진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두워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방에 불도 켤 줄 모른 채 하염없이 김문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민혜의 고백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문수가 집에 찾아와 했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었다.

"저는 조순호 씨를 깊이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김문수 씨, 취직은 하셨나요?"

조순호는 자책감으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한 사나이의 진실한 고백을 그렇게 경박하게 받아들였던 자신은 야비한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때 김문수가 받았을 상처의 깊이를 헤아려 보았다. 그녀는 고통과 슬픔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새로이 불거진 또다른 의혹

조순호는 며칠 후 또 다른 일로 무서운 의혹에 휩싸여 들었다. 이미 결혼 시기를 놓친 그녀에게 닥치고 있는 결혼에 대한 부모의 요구는 집요했다. 그녀는 결혼 얘기만 나오면 환멸감이 치밀었다. 마침 그 날은 사촌 조준호가 와서 조순호의 결혼 얘기를 꺼냈다.

"순호 언니처럼 모든 걸 갖춘 여자가 결혼을 안 하니까 사람들은 언니가 무슨 병이라도 있는지 안다니까요."
조순호 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언니, 좋은 데서 중매가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면서?"
조순호는 사촌의 말을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혹시 사람이 있는 거 아니야?"

이 말을 한 조준호는 불현듯 무엇이 떠올랐다는 듯이 동작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과일을 집던 포크를 쟁반에 딸각 소리를 내며 놓아 버렸다. 어머니와 조순호는 사촌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살폈다.
"맞아, 그랬어. 그 남자는 분명히 언니를 찾아왔었던 거야."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이니?"

조준호는 교회 반주를 했던 어느 여름밤의 기억을 되살려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는데 한 남자가 따라 붙어 자기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냈다.
"그 남자는 나를 언니로 잘못 봤던 거야."
조순호는 순간 불길한 의혹에 휩싸여들었다.

"주보에 나와 있는 반주자 이름도 거의 같잖아. 그 사람은 그 날 반주한 나를 언니로 알았던 거야. 그 사람 말고도 반주를 언니가 계속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그 남자는 조순호에게 말했다고 했다.

"말없이 가시더니 방학이라고 이렇게 오셨군요?"
내용으로 보아 김문수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순호는 물었다.
"그래서 네가 뭐라고 했니?"
조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놓고 꼬듯이 돌렸다.
"미안해, 언니."

조순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들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왜, 아니꼬우세요?'라고 되쏘아 버렸어."
어머니는 침착했다.
"그 뒤로 그 남자가 어떻게 했니?"
조준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 남자는 없어졌어요. 순식간에"라고 말했다.

- 취직은 하셨나요?  - 왜 아니꼬우세요?

조순호는 책상에 앉아 절망감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취직은 하셨나요? 왜 아니꼬우세요? 김문수가 자기를 용서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임시정부, 장사에서 다시 뭉치다

학교를 그만 둔 김영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화의 편지 말고는 그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없었다. 정화로부터는 연이어 많은 편지가 왔다. 모아 놓은 편지가 두툼해졌을 때 그는 짐을 꾸렸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는 신라와 백제의 고도인 경주와 공주를 먼저 보고 싶었다.

김영세는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된 유적 앞에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주막에 가서 탁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셨다. 얼마 후 그는 초라한 행색으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정화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김영세 선생님께

1937년 7월 7일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화된 것입니다. 임시정부도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로 한 것입니다. 빨리 군사력을 갖추어 한중연합군을 성사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임정 내에 군사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임정에 가담한 모든 정당과 단체들은 '한국광복전선'을 만들어 단결을 도모하기로 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다시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장사(長沙)에 가 있는 백범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물었습니다. 백범은 어서 장사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일본군에 밀려 쫓겨 다니다가 일단 장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즉시 살림을 정리하고 장사로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중일전쟁이 터진 지 21일 만에 북경이 점령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끝내 남경도 점령해 버렸습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야만적인 대학살을 자행하여 수십만의 양민을 죽였습니다. 이른바 남경대학살이었습니다. 남경 학살의 지휘관 중에는 한인 장교도 있었습니다.

다시 독립지사들이 장사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당원과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반갑게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상해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이동녕, 이시영, 조한구 선생 등을 4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예관 신규식의 동생 신환(신건식)도 다시 만났습니다. 이동녕 선생은 신환 내외가 모셨고 우리는 이시영 선생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장사에 도착한 1938년 5월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목청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임정요인들이 이운환이라는 청년의 총에 저격된 것입니다. 백범은 가슴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청천, 유동열, 현익철 등도 중상을 입었는데 현익철은 끝내 소생하지 못했습니다. 범인 이운환은 중국 경찰에 넘겨졌으나 조사를 받던 중 탈옥하여 배후가 누구인지, 저격 동기는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자리매김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자리매김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장사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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