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살 젊은 나이에 죽기는 억울하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102] 대륙의 정복자 숨을 거두다

등록 2008.09.23 15:53수정 2008.09.2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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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바다와 연결된 만리장성. 장성의 시발점이자 종점이다. ⓒ 김광수


홍승주는 숭정제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다. 그러한 그의 생사마저 알 수 없다니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홍승주의 장례와 제사를 성대하게 치러주라 명한 숭정제는 오삼계를 산해관에 투입했다. 전략요충을 사수하라는 것이다.

홍승주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홍이포 사정권에 확보한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북경을 어떻게 접수할 것인가?"

산해관은 바다와 연결된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다. 청나라가 북경을 접수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전략요충이니만큼 명나라 군대가 집중돼 있다. 홍승주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명나라 군사가 지키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돌파하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홍타이지는 회의적이었다.

"저에게 선봉장을 주시면 사흘 이내에 폐하께 북경을 바치겠습니다."

홍타이지의 장자 호격이 젊은이답게 호언장담했다. 

명나라 군대가 문제가 아니라 이자성의 반란군이 문제다


"명나라 군대가 문제가 아니라 이자성의 반란군이 문제다. 그들의 사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다. 대책을 내놓아라."
"이자성의 비적이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산해관을 방어하는 명나라 군세가 약해졌지만 그래도 대국의 군대입니다. 비적과 명군이 탈진하기를 기다리며 조금 더 시기를 기다림이 좋을 듯합니다."

범문정이 신중론을 폈다.

"우리가 북경으로 나아가려면 산해관을  통과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꼭 산해관을 거쳐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동안 수군을 통하여 산둥을 쳐보았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조양과 승덕을 경유하여 만리장성을 두드려 보았는데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산해관을 우회하여 열하로 침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도르곤은 그동안 견고한 산해관을 피해 허술한 곳을 탐색해왔다.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름길은 승덕과 조양을 통과하는 길이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산해관 길은 오히려 우회로다. 하지만 승덕을 지나면 산악이 이어진다. 식량을 실은 수레와 마병이 통과하기에는 험준한 산악이다. 도르곤은 힘들더라도 허술한 곳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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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관문' 산해관 ⓒ 김광수


"산해관은 천하제일관문이다. 어찌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자가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희생이 따르더라도 관문을 통과 할 것이다."

홍타이지가 선을 그었다.

"본대가 북경에 들어가기 앞서 탐색전을 실시한다. 다라를 대장군으로 삼고 호격을 부장으로 삼아 기내팔고산(畿內八高山), 한인팔고산(漢人八高山), 몽고팔고산(蒙古八高山)을 줄 터이니 군병을 두 길로 나누어 북경을 정벌하라."

홍타이지의 명령이 떨어졌다. 명나라군의 군세를 시험하기 위한 탐색전이니만큼 젊은 장수를 선발했다. 다라는 홍타이지의 동생이고 호격은 아들이다. 그동안 도르곤의 전공에 기가 죽어있던 장자 호격의 사기를 살려주기 위한 배려도 깔려있다.

정예 8기군 정홍군, 양백군, 양남군을 지휘한 두 장수는 승덕을 통과하고 장자령을 넘어 만리장성을 돌파했다. 장성을 경비하던 명나라 군은 8기군 깃발을 보고 혼비백산 도망가기에 바빴다. 장성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은 텅 비어있었다. 청나라 군은 질풍노도와 같이 북경 외성에 당도하여 동편문과 좌안문을 부수고 내성으로 진입했다.

북경은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요새

북경은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요새다. 하지만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군대가 방어하는 요새는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청나라 군은 명나라 39진(陣)을 격파하고 3부(府) 18주(州) 67현(縣)을 손에 넣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청나라 군은 노왕(魯王) 주이패, 낙릉왕(樂陵王) 주홍식, 동원왕(東原王) 주이원을 주살하고 그 외 6왕을 목 베었다. 팔기군은 탐색전이니만큼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퇴각했다. 돌아오는 청나라 군은 92만 명의 포로를 끌고 왔다.

청나라 군에 일격을 당한 숭정제는 망연자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외성에 진동하는 팔기군의 말발굽 소리는 숭정제의 숨을 멎게 했다. 변방의 오랑캐라 얕잡아 보던 청나라가 북경을 넘보고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남쪽에는 이자성의 반란군, 동쪽에는 청나라의 팔기군, 북경은 절해고도와 같았다. 숭정제는 주연유를 불렀다.

"내가 한 말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입조심 하고 오랑캐를 추격하라."

퇴각하는 청나라군을 추격하라는 것이다. 주연유는 아리송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내전으로 은밀히 불러 "남경으로 천도를 준비하라" 했는데 추격은 웬 추격이냐는 것이다.

숭정제는 비밀리에 남천을 생각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천계제의 비 의안황후 장씨가 반대하여 무산된 바 있다. 불발된 남천이 궐 밖으로 새나가면 신하들을 장악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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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북릉에 있는 홍타이지의 무덤.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봉분 위에 한 그루 나무가 있다. ⓒ 이정근


팔기군이 북경을 유린하고 돌아온 심양은 전승 축하에 파묻혔다. 팔대문에 북소리가 울리고 성내는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도르곤 삼촌에 눌려 기를 못 펴던 호격이 의기양양했다. 대정전에서 전승 열병식이 열리고 봉황루에서 축하연이 열렸다. 하지만 홍타이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뇌졸중에 쓰러진 홍타이지는 원상회복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명의를 불러왔지만 효험이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만주벌판을 말 달리던 소년. 아버지와 함께 만주를 평정하고 몽고를 손아귀에 넣었다. 누루하치에 이어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을 정벌하고 이제 중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 북경을 접수할 수순만 남았다.

북경에 발을 딛고 싶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북경을 유린한 군대가 개선했어도 열병을 받지 못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홍타이지가 효장황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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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의 정비이지만 도르곤과의 관계 때문에 홍타이지와 합장되지 못했다. ⓒ 이정근

"장비!"
홍타이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비의 손을 붙잡은 홍타이지의 손이 떨렸다.

"복림이 몇 살이오?"
"여섯 살입니다. 폐하!"

호랑이 같던 홍타이지의 눈꺼풀이 내려왔다.

"왜 이러십니까, 폐하! 눈을 뜨십시오."
"보오옥리이밈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홍타이지가 장비의 손을 놓았다. 홍타이지가 숨을 거둔 것이다. 대륙의 정복자 홍타이지가 뇌졸중에 이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홍타이지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장비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순장이다. 청나라는 황제가 죽으면 비빈을 산 채로 순장하는 제도가 있었다. 도르곤의 생모 역시 누루하치의 대를 이은 홍타이지에게 순장되었다.

"현 시점에서 나를 순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황제의 장자 호격이 있지만 세(勢)가 미미하다. 자신의 소생 복림이 있지만 여섯 살 어린 아이다. 그럼 도르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온 몸이 얼어붙는 듯 오그라  들었다.

이제 32살이다. 젊은 나이에 죽는 것도 억울하지만 복림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길은 하나. 예친왕에게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 도르곤은 남이 아니지 않은가. 홍타이지의 손을 놓은 장비는 영복궁을 빠져 나왔다.
#홍타이지 #장비 #도르곤 #산해관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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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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