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51) 커피포트

[우리 말에 마음쓰기 458] ‘캐스트’와 ‘나오는 사람들’

등록 2008.10.24 17:32수정 2008.10.2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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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커피포트(coffeepot)

.. 커피포트를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런 짓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셔츠 앞섶에서 컵 하나를 꺼낸다 ..  《알도 레오폴드/송명규 옮김-모래군의 열두 달》(따님,2000) 68쪽


전기를 꽂아 커피를 끓이는 주전자를 흔히 ‘커피포트’라고 합니다. 보기글에서는 들판에 나와서 내려놓는다고 되어 있으니, 전기를 꽂아서 쓰는 주전자도 아니요, 또 불을 피워서 덥히는 주전자도 아닌 만큼, 처음부터 집에서 뜨거운 찻물을 부어서 간수하는 병, 이른바 ‘보온병’이지 싶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커피병’이나 ‘보온병’이라든지, ‘커피를 담은 (보온)병’처럼 적어야 알맞다고 봅니다.

 ┌ 커피포트(coffeepot) : 커피를 끓이는 주전자
 │
 ├ 커피포트를 옆에 내려놓는다
 │→ 커피주전자를 옆에 내려놓는다
 │→ 커피끓이개를 옆에 내려놓는다
 └ …

그나저나 ‘커피포트’라는 말이 귀에 익습니다. 어릴 적에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꼭 커피를 마시려고 이 커피포트란 녀석을 쓰지는 않았을 테며, 물만 빨리 끓이기에 좋아서 쓰기도 했습니다. 예전 우리 집에도 이 녀석이 있었지 싶은데, 전기줄만 꽂으면 조금 뒤에 물이 끓는 일이 놀라워서 마냥 들여다보고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물 끓는 모습 구경으로도 재미있고, 물 끓는 소리 들어도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끓여 보기도 했습니다.

 ┌ 커피를 끓이는 주전자(병)
 └ 커피주전자 / 커피끓이개 / 물끓이개 / 물주전자

커피를 끓이니 ‘커피끓이개’이거나 ‘커피주전자’입니다. 차를 끓이면 ‘차끓이개’나 ‘차주전자’입니다. 그러나, 커피포트는 그냥 ‘커피포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한편, 커피를 끓이는 주전자니까 ‘커피주전자’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다고 느낄 분도 있을까요. 이 물건을 처음 들여와서 두루 퍼뜨린 사람이 ‘커피포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맨 처음에는 ‘커피주전자’라고 했다면, 또는 ‘커피끓이개’라고 했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떤 말을 쓰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맨 처음 들은 이름 탓으로, 맨 처음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이들이 붙인 이름 때문에, 다른 생각 없이 ‘커피포트’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ㄴ. 캐스트(cast)


서울에서 지내거나 묵어야 할 때 얹혀 지내는 홍제동 선배네 집에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분도 있지만, 영화보기를 모두들 즐겨합니다. 선배들과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면,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곧잘 보곤 하는데, 이렇게 영화를 보노라면 늘 맨끝에,

 ― CAST

라는 말이 뜹니다. ‘엥? 뭐여?’ 하고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영화에 나온 사람들 이름이 죽 나옵니다. ‘아, 그렇구나. cast란 저런 이름을 가리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이 씁쓸합니다.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좋은 영화 하나를 보고 나서도 뒤끝이 남아 아쉽습니다.

나라밖 영화라면 으레 ‘CAST’라고 적겠지요. 영어권에서 만들 테니까. 또 영어권이나 유럽에서 두루 보이려고 만들 테니까. 그런데, 나라안 영화이고 나라안 사람들한테 보이는 영화라면, 한국사람이 만들어 한국사람만 보도록 만드는 영화라면, 우리가 알파벳으로 ‘CAST’를 적고 ‘Thanks to’를 적고 ‘End’를 적고 해야만 할는지요. ‘나온 사람’이나 ‘나오는 사람들’로 적으면, 또 ‘고마운 이들’이나 ‘고마운 분들’로 적으면, 또 ‘끝’이나 ‘마침’으로 적으면 영화가 아니 되는지요. 영화 하나 찍은 보람이 사라지는지요. 널리 사랑받을 영화로 자리매김할 수 없는지요.

 ┌ 캐스트(cast) : ‘배역(配役)’으로 순화
 └ 나오는이 / 나오는사람 / 나오는분

우리들이 즐겨보는 영화라면, 아니 우리가 한국땅 극장에서 보는 한국 영화라면, 마땅히 ‘나오는 사람들’로 적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니 ‘캐스트’도 올림말로 버젓이 실어 놓고 ‘배역’으로 고쳐쓰도록 풀이를 붙이는데, 이런 풀이를 넘어서, “나오는 사람”으로 적어 놓은 다음, ‘나오는이’를 아예 한 낱말로 삼아서, 연극이나 영화에서 일컫는 전문 낱말로 쓰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영화 찍는 분들한테 생각머리가 없다면, 우리 말을 갈고닦는 분들이라도, 말과 글을 다루는 학자님이라도 생각머리가 있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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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영화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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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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