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6000리 여정, 마침내 중경에 이르다

[김갑수 역사팩션 152]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1.12 16:21수정 2008.11.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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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백의민족이라 들었소"

다시 모험의 고비가 닥쳤다. 이번에는 용해선 철도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야음을 틈타 몰래 철길을 건너기로 했다. 어두워지면서 웬 평복 차림의 미남 청년이 그들을 찾아왔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청년은 용해선 철도 횡단을 책임진 중국군 파견 요원이었다. 정들었던 안내인은 청년에게 다섯 젊은이를 인계하고 떠났다.

청년은 철도 가까이에 있는 한 인가로 그들을 데려갔다.

"밤 1시 경이 경비 초소의 교대 시간입니다."

청년은 철도변에 깊은 웅덩이가 파여져 있는데, 그 웅덩이를 통과하는 것이 힘은 들겠지만 안전할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청년의 지시대로 어둠 속에서 밧줄을 이어 잡고 천신만고 끝에 웅덩이를 통과한 다음 낮은 포복으로 철도를 건넜다.

그들이 철도를 무사히 건너기까지는 중국인 청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청년은 비범한 신체 기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였다. 밧줄에 태워서 다섯 명을 안전하게 내려 보낸 것을 확인한 청년은 그 깊은 웅덩이 바닥까지 단번에 몸을 날려 사뿐히 뛰어내렸다. 마치 큰 새 한 마리가 낙하하는 듯이, 그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웅덩이에서 올라갈 때 역시 날아오르듯이 가뿐히 올라 밧줄을 잡고는 올라오는 다섯 명을 괴력의 기운으로 끌어 당겼다. 그는 무예의 달인임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10여 리 길을 청년은 정중한 어조와 태도로 안내했다. 마침내 호숫가에 이르러 청년과 헤어지게 된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이라도 알아 놓고 싶었다.


중국말을 아는 김준엽이 청년에게 작별의 아쉬움을 토로하며 이름을 물었다.

"그까짓 이름 따위는 알아서 무엇 하겠소? 중국의 한 애국 청년이었다고 기억해 주시오. 그것으로 충분하오. 차후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피차 자유의 나라가 되거들랑 오늘 밤의 일은 추억으로 간직되겠지요."


청년은 말을 마치자 손을 번쩍 들어 이별의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는 바람에 불려가듯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쇳조각을 토막토막 잘라내는 듯이 날카로우면서도 자신감 있는 말소리와, 전광석화 같은 육체의 놀림과, 조각처럼 준수한 이목구비의 청년을 젊은이들은 현실감을 가지고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장준하 일행이 어느 중국군 유격 부대에 다다른 것은 다시 일주일을 걸은 뒤였다. 그들의 의복은 갈가리 헤져 살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루 한 끼 정도밖에 먹지 못하며 걸은 얼굴과 눈 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 유격대장의 친절은 조선 청년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지금 조선의 혁명 청년들이 겪는 이 고통은 훗날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격대장은 청년들에게 즉각 목욕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그들을 감격시키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방에 앉아 있는데 한 병사가 들어오더니 몸의 치수를 재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들에게 새 옷이 지급되었다. 무명으로 된 흰색 군복이었다.

"우리 중국군의 군복은 청색이오. 여러분은 백의민족이라고 들었소."

한국의 젊은이들은 유격대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쉬운 석별의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 땅에서 고생을 시켜 미안하기 짝이 없소. 앞으로 중· 한 양국이 하는 일이 모두 성공하기를 빌 뿐이오."

그는 소정의 비상금까지 건네며 무장 호송병을 붙여 주었다.

"조선의 최고 엘리트 청년들이며 동시에 혁명 전사들이시다. 추호의 결례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여 모셔라."

유격대장의 엄명 때문인지 순진한 무장 호송병들은 고관이라도 호위하는 듯이 우쭐대며 행렬의 앞뒤를 따라왔다.

그들은 사흘을 더 걸어 안후이성 와양이라는 소도시에 도착한다. 조선의 읍 정도에 해당하는 지방 도시였다. 다음 기착지는 임천이라는 곳인데 그곳에는 조선인 청년이 많이 모여 있다고 호송병이 말했다. 와양에서 하룻밤을 묵은 그들은 가벼운 걸음으로 출발한 후 이틀 만에 한 이정표를 보게 되었다.

'임천 전방 100리.'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지독한 향수병이 도지다

그들은 동포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려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민가를 찾아들었다. 비는 한사코 그칠 줄을 모르고 사흘째 내리부었다. 그들은 방에 벌렁 누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원망할 따름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여유와 휴식은 젊은이들에게 지독한 향수를 도지게 했다. 원래 장준하는 무엇이건 그다지 그리워하는 기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리워하는 정도를 넘어 앓고 있었다. 그는 비 내리는 고향 마을의 정경을 선명히 떠올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조국의 모습은 환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허리에 책보를 차고 들짐승이 지나간 길을 걷던 시절, 아니면 싸리나무가 키를 넘게 우거진 오솔길을 걷던 그 때, 하얀 눈에 찍힌 노루 발자국을 따라 가던 그 시간...

장준하의 기억 속에 담겨 있는 고향과 조국은 그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빼어난 정경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비가 멎었고 그들이 또 한 나절을 걸어 도착한 곳은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였다. 학교 내에 조선광복군 훈련반이 부설되어 있었다. 훈련반의 책임자는 김학규 장군이었는데 그는 독립군이라기보다는 마음씨 착한 시골 아저씨 같아 보였다.

"얼마나 힘이 드셨소?"
"장하오, 정말 큰 고생들 하셨소."
"그 죽을 고비를 다 어떻게 넘겼소?"

다섯 젊은이들은 그들을 위로하고 치하하는 모국어의 홍수에 둥둥 떠밀리는 듯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더 감격시킨 것은 대열 속에서 손을 번쩍 들며 뛰쳐나오는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부관연락선에서 또는 훈련소에서 혹은 일군 병영에서 그저 얼굴 정도나 익혔던 사이였지만, 그들은 사선을 넘고 다시 만났다는 동질감으로 무조건 달려들어 얼싸안았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이름을 나누며 악수와 포옹을 거듭했다. 밤을 새우며 서로의 탈출 방법과 경로를 물었고, 그동안 만난 중국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준하는 자기보다도 더 험한 경로와 고비를 넘은 동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래도 그 날 밤은 새로 온 다섯 명이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다섯 명에 대해 궁금한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물었다. 새벽녘이 되어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는지 어떤 젊은이는 그들이 입고 온 하얀 군복에 대해 묻기도 했다.

양자강에 주황빛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중앙군관학교를 3개월 속성으로 마치고 중국군 준위로 임관한 50명의 한국 청년은 5천 톤급 군용선 갑판에 서서 장강의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갑판의 난간이 이따금씩 흔들렸지만, 그들은 물과 산과 하늘을 하염없이 둘러보았다. 그들은 조국의 임시정부가 있다는 중경을 향해 마지막 여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8일 동안 장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야 하는 마지막 험로였다. 

뱃고동이 길게 울고 뱃머리가 서서히 돌아갈 때, 그들은 임시정부에 가서 만날 민족 지도자들의 이름과 풍모를 머리에 그려 보았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어떤 청년은 팔짱을 끼는 것으로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배가 움직이자 선미의 물이랑이 굽이쳤고, 그것이 빨래판 같은 물살을 만들며 선체는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어둠이 내리면서 물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서야 청년들은 하나 둘씩 선실로 들어갔다.

승객은 대부분 중국 군인이었다. 완장을 두른 공용 연락병도 더러 눈에 띄었다. 한국의 학도병들이 승선한 곳은 파동이라는 곳이었다. 파동에서 중경까지는 천오백 리의 물길이었다. 중경에서 물을 따라 내려오는 파동은 3일 뱃길이라는데, 파동에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경은 8일씩이나 걸린다고 했다. 그만큼 물살이 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강은 허허벌판처럼 넓은 곳도 많았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 강은 바다처럼 광활했다. 풍경은 올라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일본

배 위에서 네 번째 석양을 본 날 저녁, 그들은 만현이라는 곳에 내려 중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새벽에 다시 배에 올라 네 차례의 해돋이를 본 날 오후 그들은 마침내 중경의 시가지를 먼발치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언덕 위에 모습을 보인 건물 유리창마다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청년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험난했던 6천 리 여정의 마무리를 자축했다.

"아니 중경이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3년 만에 중경에 온다는 인솔 책임자 진 교관의 말이었다. 중경은 고층건물이 들어차고 도로 포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중국 제1의 거대 도시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원래 중경은 암반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했다. 장개석 정부가 중경으로 후퇴하자, 일본은 1942년까지 중경을 무차별로 공습했다. 그래서 도시의 반이 파괴되고 군사 시설들은 모두 굴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일본은 미국에 완전히 제공권을 빼앗겨 일본 비행기가 중경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고 진 교관은 말했다.

"미국이 운남성 곤명에 비행장을 닦아 제14 항공대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장준하 #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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