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바꿔치기하여 가문을 잇다

[두 바퀴에 싣고 온 이야기보따리 61] 사육신을 모신 묘골 육신사 이야기

등록 2008.11.20 23:37수정 2008.11.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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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골 마을(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육신사가 있는 묘골 마을은 온통 옛집으로 둘러싸여 있답니다. ⓒ 손현희


“묘골? 우와! 마을 이름도 그렇지만 들머리부터 꽤 남다르다.”
“그렇지? 묘리, 묘골, 마을 모양이 묘하게 생겼다고 해서 ‘묘골’이래.”
“그러니까 여기가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단 말이지?”
“그렇대. 나도 다른 건 몰라. 그거밖에….”

묘골 마을에 처음 찾아갔을 때는 지난 음력 8월 한가위 때였어요. 왜관, 대구를 거쳐 청도까지 자전거를 타고 이틀 동안 다녀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가는 길목에 가장 처음으로 들른 곳이 바로 묘골 ‘육신사(六臣祠)’였지요. 이때 이야기를 기사로 담지 못해서 몇 주 앞서 가을빛이 물든 육신사 풍경을 담으려고 다시 다녀왔답니다.


묘골 마을 들머리엔, ‘충절문(忠節文)’이라 쓴 큰 문이 하나 있어요. 벌써부터 이곳이 왠지 여느 마을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에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고 하더니, 들머리부터 꽤나 웅장하게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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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문 묘골 마을 육신사 들머리에요. '충절문'이라 쓴 큰 문이 벌써부터 꽤나 웅장한 모습입니다. 뭔가 남다른 얘깃거리가 숨어 있는 듯합니다. 이 길은 9월에는 길가에 배롱나무꽃이 한창 피어나 매우 아름답고, 늦가을 풍경도 꽤 아름답지요. ⓒ 손현희


묘골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지키며 사는 곳

본디 이곳 묘골(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은 사육신 가운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랍니다. 광복되기 앞서만 해도 100집쯤 있었으나 지금은 서른 집쯤 남아 있답니다. 또 지금 마을 안에는 온통 전통 방법대로 옛집을 짓고 있는 곳이 많았어요. 바로 달성군에서 이 마을에 ‘육신사 성역화 사업’을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육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선의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으로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던 일이 있었지요. 그때, 박팽년을 비롯하여 이개, 하위지, 유성원, 성삼문, 유응부가 단종의 복위를 꿈꾸며 일을 꾸몄으나 함께 했던 ‘김질’의 밀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난 ‘사육신 사건(병자사화(丙子士禍))’을 일으킨 분들이지요.

이일이 있은 뒤, 세조가 손수 이들을 조사하고 달래며 모의한 사실이 없다고만 하면 살려준다고 했지만, 옳은 일에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은 모두 끝내 죽게 되었지요. 박팽년 선생도 이때 감옥에서 8일만에 숨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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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뜰 안 육신사 너른 마당이 가을빛으로 곱게 갈아 입었어요. 사육신 여섯 분들의 훌륭한 뜻을 새기며 그 넋을 기리는 곳이랍니다. ⓒ 손현희


육신사는 바로 이 사육신, 여섯 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랍니다. 육신사로 들어서는 외삼문은 그 크기부터 매우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뜰 안에는 온통 곱게 단풍이 들어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었어요.

앞마당엔 마침 묘사를 지내러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서울에서 큰 버스를 타고 온 이들도 있었고, 갖가지 자동차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답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문화관광해설사’ 아저씨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오가는 이들한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고 있더군요. 그 덕분에 우리도 가서 이것저것 육신사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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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사 이곳이 바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에요. 문이 잠겨 있어 담너머로 찍은 사진입니다. ⓒ 손현희


사육신 가운데 오로지 박팽년 선생만 후손이 있다

“여기는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지만, 맨 처음엔 박팽년 선생만 따로 모셨던 곳이랍니다. 원래 다른 분들은 후손이 하나도 없지요.”
“아…. 왜….”
“그 옛날 세조가 이 어른들을 볼 때엔 역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대역죄인’을 그 가족들이라고 해서 그냥 두었겠어요. 그때만 해도 그런 사람들은 온 가족을 다 죽이고, 그 자손들까지도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으니까요.”

“아, 그렇죠.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박팽년 선생은 어떻게 후손이 있게 되었나요?”
“그 얘기가 참 재미나요. 그건 바로 선생의 자부(며느리) 때문이지요. 선생의 둘째 며느리의 친정이 바로 이 묘골이었답니다. 그때 이 며느리도 관비가 되어 친정동네로 왔지요. 그런데 그때 뱃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아, 네. 그럼 그 아기가…?”
“그렇지요.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역적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들이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라면 관비로 삼게 되어 있었지요.”
“아들을 낳았군요.”
“그렇지요.”
“그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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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뜰 사당 앞에서 내려다 본 육신사 뜰이랍니다. 묘골 마을은 겹겹이 옛집을 짓고 살고 있답니다. 지난날에는 아흔아홉 칸 집도 있었다고 하네요. ⓒ 손현희


우리는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들었답니다. 마치 어릴 적에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무척 재미나게 말씀해주셨으니까요.

“그 친정아버지가 참 지혜로운 분이었어요. 그때 마침, 딸을 낳은 여종이 있었는데 아기를 서로 맞바꿔서 길렀던 겁니다.”
“아아,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거군요.”
“그렇지요. 그때 태어났던 아기가 ‘박비(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 나중에 성종 임금 때에 억울함을 풀어 ‘박일산’이란 이름으로 살게 됨)’인데, 바로 이곳 묘골에 ‘순천 박씨’의 시조가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박팽년 선생만이 이렇게 오늘날까지 후손이 이어져왔던 거지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금 이렇게 묘골 마을에 ‘육신사’라는 사당이 있기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남아 역사를 만들고, 또 그분의 뜻을 받들어 훌륭한 정신을 이어왔다는 게 퍽 우러러 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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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보물 제554호)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기대어 달아낸 지붕)으로 만든 정자인데요. 지난날에는 '일시루'라고 했다고 해서 '태고정(太古亭)'과 '일시루(一是樓)'라고 쓴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어요. 이 정자는 박팽년 선생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것이지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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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별사 마침 묘사철이라서 별사에서는 아낙들이 한창 제사 음식을 만들고 있었지요. 이곳에는 박팽년 선생의 아들인 '박순'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요. 또 육신사 서쪽에 신도비가 따로 있습니다. ⓒ 손현희


또 사육신 여섯 분을 이곳 육신사에 모두 모시게 된 이야기도 퍽 남다른 얘깃거리가 있답니다. 본디 ‘육신사’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지은 건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답니다. 지난 1974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요.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처음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며 제사를 지냈는데, 선생의 현손인 ‘계창’이 고조부의 제삿날, 꿈속에서 여섯 분 선생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나머지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다고 해요. 그 뒤에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모두 모셨다고 하네요. 그 뒤로도 ’낙빈사‘에서 위패를 모시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맞물려 이곳도 함께 훼손된 것을 다시 묘골 마을 안쪽에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된 거랍니다.

육신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태고정(보물 제554호)이랍니다.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것인데, 임진왜란 때에 불타 망가졌던 것을 다시 고쳐 세운 집인데 지붕 한쪽에 또 다른 지붕을 덧대어 부엌과 온돌방을 만든 것이 퍽 남다르답니다.

또 육신사로 들어가기에 앞서 ‘도곡재’라는 재실도 옛집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기에 꽤 좋은 곳이지요. 묘골 마을에는 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도 올바른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올곧은 마음과 나라에 충성하는 매우 소중한 가르침을 배우기에도 무척 좋았지만, 온 마을이 옛집을 지키며 또 가꾸면서 살아가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르고 찾아온 나그네도 참 뜻 깊은 나들이라 느낄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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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재(대구 유형문화재 제32호) 1778년(정조 2) 대사성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이나, 1800년대에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쓰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너른 마당과 옛집이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여기도 태고정과 비슷한 방법으로 지었더군요. ⓒ 손현희


한 가지 아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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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비 사당 앞에 있는 이 육각비는 여섯 면마다 사육신 여섯 분의 업적을 새겨두었답니다. 자기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가문이 죽임을 당하는 걸 무릅쓰고라도 올바른 일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높은 정신은 매우 우르르게 됩니다. 다만, 이 빗돌 곁에 이 훌륭한 얼을 되살리고 누구나 알기쉽게 우리 말로 쓴 안내판이라도 따로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 손현희

우리한테 재미나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아저씨는 공무원으로 지내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이곳에서 ‘문화관광해설’을 하고 있지만 퍽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하셨어요.

요즘 자라나는 학생들이 우리 문화재를 잘 알고, 그 얼을 잘 새기면 좋겠는데,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요. 그러나 하나하나 우리 나라 역사와 곁들여 짚어주면서 이야기를 해주면 모두 알아듣고 어린 초등학생들도 자부심을 가진다고 했어요.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아쉬운 것 하나를 말씀드렸지요. 바로 이렇게 훌륭하고 역사 깊은 곳에 일부러 찾아와도 온통 한문으로 쓴 글자 때문에 그저 건물이나 둘레 풍경만 보고 돌아가기가 쉽다고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다고요.

할 수 있다면, 온통 한문으로만 빙 둘러가며 써놓은 빗돌 같은 건, 그 곁에 우리 말로 쓴 안내판이라도 따로 두어 누구나 읽기만 해도 잘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아저씨도 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셨지요. 육신사처럼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따로 있어 모든 이가 자세하게 들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우리가 다녀본 곳들은 거의 안내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이 더 많거든요.

‘적어도 우리 둘레에 있는 우리 문화재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자’는 생각에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온통 한문으로 쓴 글씨 때문에 제대로 읽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가 무척 많답니다. 누군가 이런 뜻 깊은 일을 두 팔 걷어붙이고 해줄 이가 없을까? 너무 큰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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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묘골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인데요. '청년에게는 충과 효를 지도하고 예와 악을, 궁도와 마술 등을 실습시키며 부녀자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라고 쓴 안내판이 보입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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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담길 묘골 마을은 온통 옛집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움에 한참 동안 바라보게 되지요. ⓒ 손현희

덧붙이는 글 | 육신사에서 자칫하면 딱딱하게 들릴지도 모를 역사 이야기를 매우 자세하고 재미나게 들려주셨던 '문화관광 해설사'인 백운영 선생님께 무척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육신사에서 자칫하면 딱딱하게 들릴지도 모를 역사 이야기를 매우 자세하고 재미나게 들려주셨던 '문화관광 해설사'인 백운영 선생님께 무척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사 #사육신 #박팽년 #묘골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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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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