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륙을 좌우로 횡단하는 주간고속도로 90번(붉은 색). 경부고속도로의 12배에 달하는 길이로, 동부 보스톤과 서부 시애틀을 연결한다. 푸른색으로 표시된 거미줄 모양의 도로는 미국 전역의 주간고속도로망이다.
강인규
미국의 90번 주간고속도로(I-90)는 여러모로 인상적인 길이다. 우선 미국의 고속도로 가운데 가장 길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 고속도로는 동부 끝 보스턴에서 시작해 서부해안 시애틀까지 약 5000킬로미터(3000마일) 거리를 연결한다.
경부고속도로의 12배에 달하는 길이로, 이틀 밤낮을 꼬박 쉬지 않고 달려야 겨우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그리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시간은 별도로 계산해야 한다. 13개 주와 수많은 주요 도시를 경유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여행과 경제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가 이 도로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거대한 규모나 경이로운 통계수치 때문은 아니다. 내가 이 도로를 주로 이용하는 구간은 매디슨부터 시카고까지 두 시간 남짓 되는 짧은 거리다. 지난 가을, 시카고에서 일을 마친 후 오후 늦게 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도시를 빠져나와 교외를 달릴 무렵에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목적지의 중간쯤 왔을 때다. 차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는가 싶더니, 속도계를 비롯한 차의 모든 계기판 바늘이 갑자기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바늘은 한계까지 솟았다가 힘없이 떨어졌고, 이와 동시에 차는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가속기를 밟아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완전히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공상과학소설이었다면 주위에 접시 모양의 비행물체가 서성이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서는 발전기가 망가졌다는 징조였다. 재빨리 비상신호를 켜 뒤의 차들에게 경고를 보낸 후, 차를 최대한 천천히 갓길에 댔다.
기약 없는 도움을 기다리다난감했다. 마을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일리노이 벌판이었고, 내게는 도움을 청할 휴대전화도 없었다. 야속하게도 해는 아름다운 노을 속으로 지고 있었다. 고장 난 곳이 언덕 바로 아래의 직선구간이어서 차들은 무심하게 속도를 내며 지나쳐갔다. 덩치 큰 차가 쏜살같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날 때면, 내 소형차는 어김없이 덜덜거리며 몸을 떨었다.
별 수 없었다. 비상 통신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차 뒷자리를 뒤져 노트와 볼펜을 꺼낸 후 선을 여러 번 겹쳐 그어 큼지막하게 글씨를 썼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노트장을 찢어 차가 지나는 방향 유리창에 붙였다. 그러고는 차 밖으로 나와 어디서 올 지 모르는 도움을 기다렸다. 해 지는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30분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경찰차가 발견하거나 누군가 차를 세워 도와주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밤새 요기를 할 만한 것이 차에 있는지 생각하는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도와 달라'는 쪽지를 보고 차를 세우려 한 듯한데, 워낙 빨리던 차여서 100여 미터쯤 지나쳐 멈춰섰다.
운전자는 문을 열고 뒤의 교통상황을 살피더니 갓길을 후진으로 달려오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 차는 멈추었다 후진하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근처에 도착했다. 훤칠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야광처리를 한 작업복으로 보아 근처 오헤어 공항에서 일하는 노동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