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76)

― ‘150년의 전통’, ‘수년의 세월’, ‘5년의 세월’ 다듬기

등록 2009.03.21 19:29수정 2009.03.2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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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150년의 전통

 

.. 무엇이든지 하북성 출신이 제일이다라고 떠벌린 변복이라는 사람이 청조대인 1829년에 創業했다니까 벌써 150년의 전통을 가진 老店인 셈이다 ..  《중공유학기》(녹두,1985) 89쪽

 

 '제일(第一)'은 '으뜸'이나 '첫째'로 손질해 줍니다. 이 자리에서는 "제일이다라고"를 "으뜸이라고"나 "첫째라고"로 다듬습니다. '創業했다니까'는 '가게를 열었다니까'로, '老店인'은 '오래된 가게인'으로 다듬어 줍니다.

 

 ┌ 150년의 전통

 │

 │→ 150년 전통

 │→ 150년이라는 전통

 │→ 150년이나 되는 전통

 │→ 150년에 이르는 전통

 └ …

 

 전통을 말하든 역사를 말하든 "150년 전통이다"나 "오천 년 역사이다"라 하면 됩니다. 사이에 '-의'를 넣지 않아도 좋아요. 아니, 넣을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할아버지는 얼마나 사셨어요?" 하고 여쭈면 "나는 올해로 여든 해를 살았지"처럼 말씀할 테지요. 이런 말을 "80년의 삶을 살았지"처럼 고쳐서 쓰면 어떻습니까. 저는 참 어색하다고 느끼는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어떻게 느껴지는지요. 이렇게, "팔십 년의 삶을 살았지" 하고 말씀할 어르신은 얼마나 될까요. "팔십 년을 살았지"나 "여든 해를 살았지"라 말하지 않을 어르신은, 토씨 '-의'를 붙여 "팔십 년의 삶"이라 말할 분은 얼마나 될까요.

 

 보기글은 앞뒤 말까지 아울러 다듬어, "벌써 백쉰 해나 이어온 오래된 가게인 셈이다"처럼 적으면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ㄴ. 수년의 세월

 

.. 희석화되고 왜곡된 저열한 차용까지도 그것이 폭파되기까지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읍니다 ..  《엘리아스 카네티/반성완 옮김-말의 양심》(한길사,1984) 344쪽

 

 '희석화(稀釋化)되고'는 '흐려지고'나 '뿌얘지고'로 다듬을 수 있을까요. '왜곡(歪曲)된'은 '비틀린'으로 손질하고 '저열(低劣)한'은 '질낮은'이나 '지저분한'으로 손질합니다. '폭파(爆破)되기까지는'은 '깨지기는'이나 '사라지는'쯤으면 손봅니다.

 

 ┌ 수년의 세월이

 │

 │→ 여러 해가

 │→ 짧지 않은 세월이

 │→ 적잖은 세월이

 └ …

 

 '수년(數年)'은 "여러 해"를 가리킵니다. 흔히 두세 해나 서너 해, 또는 네다섯 해나 대여섯 해를 가리켜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서너 해가 걸렸습니다"나 "대여섯 해가 걸렸습니다"로 다듬어 줍니다. 딱히 숫자로 몇 해가 걸렸는가를 밝히기 까다롭거나, 숫자를 안 밝혀도 된다면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로 다듬으면 되고요. 대여섯 해나 예닐곱 해라고는 하지만, 이만한 세월이 참 길다고 느껴졌으면 "짧지 않은 세월"이나 "적잖은 세월"로 다듬습니다.

 

 

ㄷ. 5년의 세월

 

..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후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미제국주의의 통치하에서는 와이셔츠 하나 만족스럽게 살 수 없었다 ..  《이승기-겨레의 꿈 과학에 실어》(대동,1990) 81쪽

 

 "돌아온 후(後)"는 "돌아온 뒤"로 다듬습니다. "미제국주의의 통치하(統治下)에서는"은 "미제국주의가 다스리는 곳에서는"이나 "미제국주의가 다스리는 동안에는"으로 손보고, '만족(滿足)스럽게'는 '즐겁게'나 '걱정없이'로 손봅니다.

 

 ┌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

 │→ 5년 세월이 흘렀지만

 │→ 다섯 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 다섯 해가 흘렀지만

 │→ 다섯 해나 되었지만

 └ …

 

 보기글에서는 토씨 '-의'만 덜어도 됩니다. 그러나 '5년(五年)'이 아닌 '다섯 해'로 적는다면 "다섯 해의 세월"처럼 적는 분은 거의 없고 "다섯 해라는 세월"처럼 적곤 합니다. '세월'이라는 낱말을 덜고 토씨를 달리 붙여서 "다섯 해가 흘렀지만"이나 "다섯 해나 흘렀지만"으로 적어도 돼요. 또는 "다섯 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으로 적어 보거나, "다섯 해이지만"으로 적어 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즈음 들어 "다섯 해라는 세월"보다 "다섯 해의 세월"처럼 적은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이든 신문이든 이와 같이 적을 뿐, "다섯 해라는 세월"이나 "다섯 해가 되는 세월"이나 "다섯 해에 이르는 세월"처럼 글을 쓰는 사람을 웬만하면 찾아보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말이요, 나날이 새로워지는 글이니, 우리 말투며 우리 글투며 늘 다른 모양새이곤 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루하루 달라지는 말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알맞는 쪽으로 달라질까요. 나날이 새로워지는 글은 얼마나 올바르고 살뜰하게 새로워질까요.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을까요. 우리는 싱그러운 매무새를 잃지 않고 있을까요. 우리는 훌륭하거나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우리 말은, 우리 생각은, 우리 넋은, 우리 터전은, 우리 이웃은 어떻게 어우러져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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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1 19:29ⓒ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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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씨 ‘-의’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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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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