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거운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리려는 듯 김성식에게 신문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김 선생은 평소에 한글 사용을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인공이 잘하는 거지요?"
"인민공화국 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한글 전용입니다."
"남에서도 그렇듯이 북의 학자 중에도 한글 전용을 우민화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한글 전용에 원칙적으로 찬성입니다."
"김 선생의 생각이 앞선 거요."
"다만 북에서 한글을 전용한다면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거의 줄지 않고 있는 점이 이상합니다. 오히려 한문 어휘를 새로 더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점이 있던가?"
"예컨대 '창발성을 제고하여서' 라든지, '경각성을 높여서' 라든지, '견결히 반대한다.' 같은 말들은 제가 듣기에도 생경합니다."
"옳으신 지적이군."
"이북에는 이기영, 이태준, 한설야, 안희남, 김남천, 임화 등의 쟁쟁한 문장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분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더 좋을 듯싶습니다."
"주로 소련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오히려 한문을 더 좋아한다오. 조카가 오면 말해서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리다."
"고맙습니다."
김성식은 이남에서도 서양물이나 먹었다는 사람일수록 어려운 한자어를 더 즐겨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대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분명히 들렸다. 김성식은 기대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식량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생각해 보니 긴 여름 동안 그는 마음 놓고 지낸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대문만 삐걱 해도 그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혼자라면 그렇게까지 마음 졸일 것도 없었다. 아내와 어린 것 셋을 데리고 난리를 치르자니 그는 번번이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가장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그는 여름 한철 절실히 통감하며 지냈다.
게다가 움막에 있는 이두오까지 숨겨주느라 그는 한시도 마음 편한 때가 없었다. 다행히 박미애는 자기 아버지 박광태에게 움막에 이두오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박광태의 기질로 보아 그것을 알았다면 이두오는 물론 자기에게까지 해가 미쳤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어도 그의 속은 언제나 타서 연기가 나는 듯했다.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한철이었다.
그런데 그 여름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황이 역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대포 소리까지 들리니 그는 흥분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서울 가까이 온 것이다.'
그는 본시 대한민국에 충성한 백성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하는 일마다 올바른 것은 없는 것 같았고 대한민국 되어가는 품이 영 미덥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한 번쯤은 인민공화국의 백성이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막연히 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성격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에는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대한청년회에서 순수 교양 강좌를 해 달라고 그렇게 졸랐지만 끝내 건강을 핑계로 사양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인민공화국에 대해 뚜렷한 향심을 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 인민공화국에 대한 그의 기대는 재작년 <민성>지의 북조선 특집호를 읽고 식어버렸었다.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같은 쟁쟁한 사람들이 말끝마다 '우리의 영명한 장군 김일성'을 올리는 것을 보고 그는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다만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보다 부패하지 않은 점이 탐탁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회색주의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서 활동하는 그들이라면 자기에게 기회주의자라고 욕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 들었다. 하지만 그의 기회주의는 한 번도 어느 편이 승세인가, 또는 어느 편에서 내가 더 출세할 수 있겠는가를 따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기회주의는 어느 편이 올바른가를 따지는 것이었고 어느 편이 부끄럽지 아니한가를 숙고해 보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만은 그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들었다. 학교에서 숙청되었으니 누군가 자기를 반동으로 엮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쟁 초반에 박광태가 구속시키려 한 것 말고는 아무도 그를 해코지하지 않았지만 그는 늘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는 스스로 죄인처럼 행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개는 잡혀가고 아무개는 총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천 월미도에 출현한 미군
그는 어제 저녁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인천 월미도에서 정릉으로 피난 온 사람이 있었다. 수소문을 해 보니 바로 길 건너 있는 앞집이었다. 젊은 여자였는데 친정으로 피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숙에게 밀가루 한 봉지를 딸려 보내 정황을 좀 알아보라고 했다. 다녀온 정숙은 희망적인 소식과 슬픈 이야기를 동시에 전해 주었다. 여자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고 했다.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사는 젊은 과부였다. 집에 아이를 재우고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고 들어오는 길에 통행을 제지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통행을 막은 것은 놀랍게도 미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기에게로 끝내 갈 수 없었다. 미군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집이 있는 마을 부근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젯밤 몰래 청취한 라디오에서 유엔군의 대폭 증원 소식을 들었다. 그랬는데 하루 만에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풍설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인민군 총사령부 보도에는 적이 군산으로 상륙하려는 것을 분쇄했다고 했다.
'대포 소리가 이 정도면 대체 몇 리나 떨어진 걸까?'
'군산에 상륙하는 척하고 인천으로 온 것일지도 몰라.'
김성식의 추정은 사실과 거의 근접하는 것이었다. 미군이 인천항에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1950년 9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인천으로 접근하는 수로는 조건이 나빠서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상륙시키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인천항의 조수간만 차가 9m에 달하는 것이 문제였다. 대형 선박이 갯벌로 진입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군은 저녁 시간 만조 때를 선택했다.
다음으로는 인천항을 가로막고 있는 섬 월미도가 문제였다. 월미도는 인천에 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미군은 본격적인 상륙에 앞서 아침 만조를 택해 월미도를 기습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월미도 주민이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한편 미군은 인민군을 교란하기 위하여 사전에 군산항 주변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고 영국 함정을 배치했으며 미·영 합동 특공대를 침투시키기도 했다. 9월 14일에는 군산 상공에 비행기를 동원해 '시민들은 해안에서 철수해 내륙으로 피난하라'는 전단지를 살포하기도 했다.
김성식은 문득 집에 버려진 섬 아기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아기가 어찌 되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혼자서 아침잠을 자고 있던 그 아기는 엄마 대신 들이닥친 미군을 알기나 했을까? 아니면 폭격으로 미리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옆에서 몸을 뒤채고 있는 정숙을 불러 보았다. 마음 아득히 깊은 곳에서부터 미세한 통증이 일었다.
"숙희 엄마!"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으세요?"
"그 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엄마를 한 없이 기다리다가..."
김성식의 눈가에 물기가 배어지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 그는 아무 기운 없이 동요 하나를 웅얼거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정숙도 이심전심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들어 있었던 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총을 든 미군이 아기의 방에 들이닥쳤을까? 아니면 그 전에 터진 포탄 소리에 경기(驚氣)라도 내며 자진해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다. 혹시 마음씨 착한 양키가 아기를 곱게 거두어 주지는 않았을는지?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막연하게라도 알게 된 어린 것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그는 이런 생각, 저런 궁리들을 하며 깊어가는 밤을 잊고 있었다. 전쟁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슬픔들을 이곳저곳에서 마구 잉태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2009.04.25 17:28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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