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찾아 듣는 '낡은 노래테이프'

[책이 있는 삶 102] '이지연ㆍ라붐2ㆍ김현식' 테이프 다시 듣기

등록 2009.05.10 12:08수정 2009.05.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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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1970년대에 나온 낡은 노래테이프를 헌책방에서 열 나문 사들였습니다. 스무 해나 서른 해가 묵은 녀석들기 때문에 제대로 돌아가나 알아보려고 하나씩 카세트에 넣고 돌립니다. 몇 가지는 소리가 잘 안 나오거나 지지직거립니다. 그렇지만 그럭저럭 들을 만하기에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들으면서 일을 합니다.


묵은 노래테이프를 들을 때면, 테이프가 끝나는 자리에 꼭 '건전가요'가 하나씩 끼어듭니다. 때로는 군인노래(군가)가 끼어듭니다. 군대에 있을 적에 죽어라 불러야 했던 그 노래를 묵은 테이프에서 들으니 새삼스럽습니다.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습니다. 군대에서 벗어난 지 벌써 열 해가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그 군인노래들이 제 귓가와 입가에 맴돌고 있네요.

지난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 군인노래를 짓고 건전가요를 짓던 사람들은 어떤 열매와 빛과 보람과 돈과 이름을 얻었을까요. 지난날 군인노래와 건전가요를 짓던 사람들은 높은 이름과 많은 돈과 노래판 힘을 얻었을까요. 그 돈과 이름과 힘은 여태까지도 고이고이 이어오고 있을까요.

문득, 그때 그 사람들이 군인노래와 건전가요가 아닌 다른 노래, 여느 대중노래를 지었다면 어떠했을까, 자기 창작욕이나 상상힘을 불태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쎄, 그 사람들한테는 자기 창작과 생각과 꿈을 한껏 불사르기보다는 손쉽고 값싸게 돈과 이름과 힘을 얻는 쪽으로 가기만 했을까요. 그 길이 당신들 노래를 북돋우며 가꿀 뿐 아니라, 당신 한몸과 식구들 여러 몸을 먹여살리는 길이었을까요. 자유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이 넘실넘실거리는 터전이든 아니든 당신들하고는 아무런 끈이 없고 조금도 마음쓸 일이 없을 뿐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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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퍽 묵은 노래테이프를 만나기도 하고, 널리 사랑받던 노래테이프를 만나기도 하며, 이래저래 지나친 노래테이프를 만나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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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마실을 할 때 곧잘 '낡은' 노래테이프를 집어듭니다. '묵은' 레코드판을 집어들 때도 있습니다. 몇 번 턴테이블을 장만했으나 바늘이 닳아 못 쓰게 되거나 턴테이블이 맛이 가는 바람에 이제는 레코드판으로 노래를 들을 수 없지만, 눈에 뜨이는 판은 곧잘 사 놓습니다. 언젠가 턴테이블 다시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붙잡으면서, 또는 이 꿈을 못 붙잡는다 하여도 내 단골 술집 아저씨한테 레코드판을 선물로 드리면서 가끔이나마 레코드 노래를 들으면 넉넉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면서.


어제는 김완선 님이 1992년에 낸 〈애수〉와 이연경 님이 1990년에 낸 1집 레코드판 두 장을 골라 봅니다. 김완선 님 음반에 들어간 사진은 구본창 님이 찍었다고 나옵니다. 이분이 레코드판 사진도 찍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니 레코드판이고 테이프이고 노래꾼들 사진이 여러 장씩 들어가는데, 이런 사진을 찍는 분들 이름을 거의 안 살폈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음반 사진은 '사진 역사'에서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낡은 노래테이프틑 열 개쯤 고릅니다. 〈이현우 1집〉, 〈변진섭 2집〉, 〈투투 2집〉, 〈왁스 1집〉, 〈이덕진 1집〉, 〈이문세 5집〉, 〈김광석 3집〉, 〈쿨 1집〉, 여기에 〈영화 '탑건' 주제노래 모음〉과 〈영화 '라붐 2' 주제노래 모음〉.


턴테이블은 없기에 녹음기로 테이프를 돌립니다. 즐겨듣는 낡은 노래테이프로는 〈한대수 그레이티스트 히츠〉(1975), 〈이지연 1ㆍ2ㆍ3집〉, 〈우순실 1집〉, 〈신정숙 1집〉, 〈신형원 1집〉, 〈장덕 1집〉, 〈한스밴드 2집〉, 〈김현식 1ㆍ2ㆍ3ㆍ5집〉, 〈강수지 8집〉, 〈박성신 2집〉, 〈언니네이발관 1집〉 들로, 책상맡에 수백 권에 이르는 책과 함께 수북하게 쌓아 놓고 있습니다. 〈노래마을〉도 곧잘 듣지만, 테이프가 꽤 늘어난 듯해서 더는 안 듣습니다. 1975년에 나온 〈한대수 그레이티스트 히츠〉는 시디에라도 옮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저한테는 그런 장비가 없습니다. 장덕 님 음반이나 우순실 님 음반, 또는 신정숙 님 음반도 머잖아 테이프가 늘어나 못 들을 듯한데, 이런 음반을 다시 장만하기란 하늘별 따기보다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나마 이지연 님이나 김현식 님 음반은 서너 차례 다시 사서 듣고 있습니다. 어제 김광석 님 세 번째 음반을 산 까닭도, 이제까지 들은 음반이 많이 늘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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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장만한 낡은 노래테이프 몇 가지. ⓒ 최종규

그나저나 어제 장만한 낡은 노래테이프 들은 '얼마나 늘어졌는지' 알아보고자 하나씩 녹음기에 넣고 돌립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씁니다. 한 시간, 두 시간 …… 모두들 꽤 괜찮습니다. 잘 샀구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1986년에 나온 〈라붐 2〉 음반이 걱정이었는데, 스물네 살을 먹은 테이프는 끊김이나 지직거림 하나 없이 맑습니다. 그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거의 서른 해 앞서 이 테이프를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처음 장만했을 그분들이 고이 간직하며 아껴 들어 주었기에 오늘에 와서도 맑은 울림으로 들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헌책방에서 묵은 책을 뒤적일 때에도 느낍니다만, 묵은 노래테이프와 레코드판을 뒤적일 때에도 한결같이 느낍니다. 책이든 음반이든 처음 장만하던 사람만 보거나 들으며 즐기지 않습니다. 처음 장만한 분께서 '나는 다 읽었으니 됐어!' 하면서 책을 불사르겠습니까. '나는 다 들었으니 됐어!' 하면서 테이프를 밟아 버리겠습니까.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들추기 어렵다 하여도 한 번 들은 음반은 수없이 다시 듣게 됩니다. 다시 들추기 어려운 책이라 하지만 아무 데나 굴리지 않고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아 놓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책이든 음반이든 열 해나 스무 해, 때로는 서른 해나 마흔 해라는 세월을 먹으면서도 퍽 깨끗하고 반듯하게 간직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고작 열 해도 안 된 책이나 음반임에도 때와 먼지를 많이 먹고 긁히고 찢어지고 접히고 법석이 아닌 녀석이 꽤 많습니다. 처음 장만하신 분들께서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하기도 했을 테지만, 그분 스스로도 되읽거나 되들으며 고맙고 즐거운 마음밥을 얻으려 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은데, '서너 해 뒹굴면서 폐휴지처럼 되어 버린 책이나 음반'하고 '서른마흔 해 묵었으나 아주 말끔히 간직된 책이나 음반'을 함께 맞대놓으며 내 손길을 돌아보곤 합니다. 오늘은 내 손에 쥐어진 책이요 음반이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이 책이나 음반은 누구 손으로 이어지면서 새 이야기를 엮게 될까 생각하면서. 나는 나대로 이 책과 음반을 기쁘게 즐긴 한편, 내 뒷사람한테 이 책과 음반을 아낌없이 물려줄 수 있게끔 고이 간수하고 있는가 헤아리면서.

물건으로 치면 '내 것'일 뿐이니 남들을 아랑곳할 까닭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말 '오롯이 내 것일 뿐'이라 할 만한 물건이란 있을까요. '오로지 내 것일 뿐'이라 할 만한 돈이란 있을까요. '그저 내 것일 뿐'이라 욀 만한 글이란 있을까요. 물건과 돈과 글을 넘어, 내 삶이란 내 생각이란 내 넋이란 '그예 내 것일 뿐'이라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내 목숨은 틀림없이 '내 목숨'일 테지만, 내 목숨을 이어가고자 수많은 다른 목숨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숨을 내 몸에 받아들이면서 내 몸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생각을 이루는 밑바탕에는 수많은 '앞선 이 땀방울과 발자국'이 서려 있습니다. 이들이 앞서 길을 걸어 주었기 때문에 책도 읽고 신문도 읽습니다. 옷도 입고 집도 얻습니다. 나 스스로 '내 몸'을 고즈넉히 되새겨야 할 터이나, '나'라는 울타리에 갇힐 때에는 '참 나'를 잊거나 잃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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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붐 2> 노래테이프. 이 노래테이프를 간직하던 분은 겉싸개 비닐을 다 뜯지 않고 아래쪽만 살짝 칼로 도려내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마음을 썼습니다. 저도 예전에 노래테이프를 사서 들을 때면 언제나 이렇게 했습니다. ⓒ 최종규

〈왁스〉를 지나고 〈이문세〉를 지나고 〈탑건〉을 지나고 〈라붐〉으로 오는 사이, 괜히 코끝이 찡합니다.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거치는 동안 내 귓가를 가득 메우던 옛노래가 예전 소리 그대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송도유원지와 자유공원과 수봉공원으로 봄나들이나 가을나들이를 가던 국민학생 때, 동무들이 장기자랑을 한다고 나온 자리에서 이문세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얼핏설핏 떠오릅니다. 되지도 않는 목청으로 이문세 노래를 부른답시고 소리를 빽빽 지르던 동무들이 참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잘 참고 들으면서 킥킥대고 웃었습니다. 저는 노래를 못 불러 장기자랑 자리에는 나가지 못하는 주제에 쟤는 어떻고 걔는 어떻고 하면서 콩을 찧고 팥을 찧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수없이 다시 본 영화 〈라붐〉에 이렇게나 많은 노래가 나온 줄 새삼 깨달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노래를 잘 지었을까 싶습니다. 하나하나 애틋하고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어린 날 제 마음자리를 파고든 영화 가운데 하나여서가 아니라, 이제 와 들어도 남다르고 빼어난 가락과 결을 느낍니다.

이지연 노래이든 김현식 노래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한 노래꾼이라서 이분들 노래를 이제까지도 즐겨듣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에만 좋아하던 노래는, 외려 이제 안 듣습니다. 저는 '추억만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나 이제나 제 삶자락을 건드리면서 일으키는 책을 좋아하고 노래를 사랑합니다. 읽을 만하니까 읽는 책이 아닙니다. 이름 높으니까 읽는 책이 아닙니다. 훌륭하다 하니까 읽는 책이 아닙니다. 제 얕은 생각을 언제나 깨우치면서 북돋아 주기에 찾아 읽는 '헌책방에 묻혀 가는 낡은' 책입니다. 제 어설픈 마음마디를 늘 건드리면서 일깨워 주기에 찾아 듣는 '헌책방에 쌓여 가는 낡은' 노래테이프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뿐 아니라 생각이 깃들어 있고, 삶이 녹아들어 있을 때 비로소 집어드는 책입니다. 느낌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이 배어들어 있을 때 바야흐로 집어드는 노래테이프입니다. 내 눈가를 적시는 책과 노래테이프이며, 내 입가에 웃음을 번지도록 하는 책과 노래테이프입니다. 오래도록 고마운 마음벗이요, 언제까지나 즐거운 마음스승이며, 한결같이 반가운 마음지기인 '낡은' 책 한 권과 '낡은' 노래테이프 하나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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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노래테이프 #라붐 #음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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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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