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 통역장교 마오안잉
중국군 부대와 인민군 부대 두 건물 모두 임시로 지어진 조립막사였다. 식당에서 식반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조수현의 앞에는 중국군 장교가 서 있었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인 마오안잉은 펑더화이 사령관의 러시아어 통역을 담당한다고 했다. 그는 조수현에게, 자기는 일선 부대 지휘관을 지원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게 한가한 통역장교를 맡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오안잉은 조수현에게 결혼 여부를 물었었다. 중국인들은 젊은 이성을 만나면 결혼 여부를 먼저 묻는 것이 예의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오안잉은 자신은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다며, 18세 아내의 사진을 조수현에게 보여주었다. 중국인에게 친화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그가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조수현은 이심전심의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오안잉과 자주 대화를 나눠 왔다.
식반을 들고 서 있던 마오안잉은 자기 뒤에 조수현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돌아보며 인사처럼 말했다.
"아침 식사가 조금 늦으셨군요?"
"네. 안 먹을까 망설이다가..."
"저하고 비슷하군요. 저는 늦잠을 잤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전혀 전장의 군인들 같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주로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들에 관한 것이었다. 글린카와 라흐마니노프 등의 음악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그들은 식당 문 앞에서 헤어졌다.
마오안잉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겨울 햇빛 속으로 걸어갔다. 조수현이 자기 막사 문 앞에 이르고 마오안잉이 연병장의 한가운데쯤에 갔을 때, 난데없는 폭음과 함께 미군 비행기가 출현했다.
미군 폭격기는 거대한 새 모양의 그림자를 연병장에 드리우면서 마오안잉의 모습을 시야에서 묻어버렸다. 이어서 조수현의 눈에 사령부로 뛰어가는 마오안잉의 뒷모습이 포착된 순간이었다. 조립 막사의 현관이 폭음과 함께 울컥 들썩거렸다. 그리고 피폭물의 중심 허공에 마오안잉의 몸체가 사선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비행기는 까마득한 산봉우리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조수현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마오안잉의 목과 가슴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오안잉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조수현이 그의 가슴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마오안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머니에는 아내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짤막한 문구가 어제 날짜로 씌어 있었다. 그것은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송사였다.
- 쑹린, 저 하늘의 별 중에서 가장 영롱한 것보다 너의 눈동자가 더 아름답다.
쑹린은 그의 아내 이름인 듯했다. 아마도 그는 어젯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그녀의 눈동자를 그려본 듯했다. 마오안잉은 부대 가까운 야산의 양지 바른 곳에 묻혔다. 조수현은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다가 중국군 장례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두오 씨, 거문고자리의 직녀성과 독수리자리의 견우성에는 애절한 이야기가 있답니다. 모두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요. 상제(上帝)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직녀였습니다. 직녀는 자기가 짠 옷감에다 빛과 태양과 그림자와 별자리들을 수놓았습니다. 그것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늘의 별들이 운행을 멈추고 직녀의 옷감을 구경했습니다.
어느 날 직녀는 베틀의 북을 내려놓고 넘실거리는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강둑을 따라 양과 소떼를 몰고 가는 한 목동을 보게 됩니다. 직녀는 아버지에게 목동과 결혼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목동 견우가 선량하고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제는 그들의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도 큰 행복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들의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제의 경고도 그들에게는 먹히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상제는 둘을 떼어 놓기로 합니다. 그래서 견우를 은하수 건너편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직녀에게는 혼자서 베틀을 돌리게 했습니다.
상제는 두 사람의 만남을 1년에 단 한 번만 허락했습니다. 직녀는 7월 7일이 되면 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많이 내리면 강물이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까치가 날아와 그들의 날개로 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별들은 그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불렀습니다.
두오 씨, 나는 마오안잉이라는 친구를 잃었습니다. 자꾸 무서워집니다. 두오 씨가 그 중국인 친구처럼 되었을지도 몰라 가슴이 떨립니다. 어제 꿈자리에는 마오안잉이 솟구쳤던 그 허공에 두오 씨가 있었습니다. 공포감으로 가슴이 파닥거렸습니다. 나는 오늘 밤도 다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잠을 못 이룹니다. 이제 겨울 하늘에서 직녀성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워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수현은 한 차례 마오안잉의 묘를 찾는다. 그는 회창에 있는 지원군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었다. 중국군 전사자는 전장의 현지에 묻는다는 관례대로 그의 유해는 조선 땅에 묻힌 것이었다. 결국 마오안잉은 죽어서도 끝내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참배를 마친 조수현은 그가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성균관대학과 동국대학으로 옮겨간 서울대학교
서울 을지로 방산국민학교에서 전쟁 후 첫 강의가 이루어졌다. 문리과대학은 성균관대학에서, 법과대학은 동국대학에서 개강했다고 했다. 학생은 두 사람뿐, 추운 교실은 을씨년스러웠으나 김성식은 일찍이 체험해 보지 못한 감흥으로 강의에 열중했다. 성균관대학에 이어 그는 동국대에 개설된 법과대학에 가서 강의했다. 유리창도 없는 강당에서 하는 강의였다. 찬바람이 들어와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김성식은 필동 사거리에서 불문과 손 선생을 만났다. 그는 지난번에 김성식을 찾아와 양식을 구하러 이천 여주까지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얼굴이 통통 부어 있었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다.
"선생님, 어찌 된 일입니까?"
"지난 달 중순께 길에서 불심검문을 받았는데, 그때 마침 인민공화국 시절의 양곡증서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오."
"그래서요?"
"그 길로 성북서로 구인되어 20여 일 동안 고생하다가 바로 어제 나왔소."
양곡배급증서라면 인민군이 처음 들어왔을 때 공무원을 상대로 특별배급을 한답시고 나눠 준 증서였다. 김성식도 그것을 쓴 적이 있는데 격식이 틀렸다고 서너 번을 고친 기억이 있었다. 가족 관계까지 세밀히 밝혀야 하는 문서였다. 그러나 끝내 배급이 없었다. 동태 파악을 위한 술수였든지, 아니면 당원과 그 끄나풀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든지 둘 중의 하나일 터였다.
그런 문서라면 자기의 가방에도 있을지 몰랐다. 어쨌든 그것이 인민공화국의 증서라 할지라도 나이 든 대학교수를 20여 일이나 감금하는 대한민국이라면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군 참전으로 다시 역전되는 전황
김성식은 신문에서 맥아더가 일선의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는 기사를 읽었다.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 유엔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이므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 달 안으로 신의주 공략을 서두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김성식은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이 지난 8월 15일 기념사에서 8월을 민족 해방의 달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벽보가 나붙었는데, 이번에는 '중공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국군들이 서울의 외곽에 참호를 파며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일찌감치 충청도 산골로나 피난을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김성식은 전황이 다급한 줄을 자기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대."
중론은 대체적으로 그렇게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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