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63) 대화와 얘기

[우리 말에 마음쓰기 642] '억누르기'와 '억제'

등록 2009.05.18 11:33수정 2009.05.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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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억누르고 억제하는

 

.. 우리 국민을 억누르고 억제하는 수많은 법률들은 실제로 국민들이 합의한 것이 아닙니다 ..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분단시대의 성찬과 평화》(일과놀이,1990) 28쪽

 

 "우리 국민(國民)을"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을"로 손보아도 됩니다. '합의'는 '合議'일까요, '合意'일까요? 이 자리에서는, "이 나라 사람들이 바라던 법이 아닙니다"나 "이 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인 법이 아닙니다"로 고쳐 줍니다. '실제(實際)로'는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보면'으로 다듬습니다.

 

 ┌ 억제(抑制)

 │  (1) 감정이나 욕망, 충동적 행동 따위를 내리눌러서 그치게 함

 │   - 나에게 있어서 솟아오르는 눈물의 억제는 어려운 일이었다 /

 │     감정의 억제를 못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  (2) 정도나 한도를 넘어서 나아가려는 것을 억눌러 그치게 함

 │   - 인구 증가 억제 / 소비 억제 / 임금 인상 억제 / 수도권 개발 억제

 │

 ├ 억누르고 억제하는 수많은 법률들

 │→ 억누르고 괴롭히는 수많은 법률들

 │→ 억누르고 못살게 구는 수많은 법률들

 │→ 억누르고 들볶는 수많은 법률들

 │→ 억누르고 쥐어짜는 수많은 법률들

 └ …

 

 토박이말 '억누르다'를 한자말로 옮기면 '억제'입니다. 또는 '억압(抑壓)'입니다. 비슷한 토박이말로 '내리누르다'와 '짓누르다'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책을 읽고 독서를 하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을 먹고 식사를 하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겹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억누르고 억제하는"이라는 말을 쓰고야 맙니다. 두 말이 겹치기인 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 눈물의 억제는 → 눈물을 억누르기는 / 눈물을 그치게 하기는

 ├ 인구 증가 억제 → 인구 늘지 않게 막음 / 사람들이 더 늘지 않게 함

 ├ 소비 억제 → 씀씀이 낮추기 / 씀씀이 줄이기

 ├ 임금 인상 억제 → 일삯 붙잡기 / 일삯 올리지 못하게 막음

 └ 수도권 개발 억제 → 수도권 개발 막기

 

 보기글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스스로 이 나라 사람을 모시거나 돌보지 않는다는 법률이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헌법에는 이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도록 마련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헌법 밑에, 또는 헌법과 다른 자리에 있는 수많은 법은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고 훔쳐보고 지켜보면서 으르릉거리도록 짜맞추어져 있습니다. 전철을 타고 움직이다 보면 으레 '불순한 사람 신고'를 알리는 방송이 두어 차례쯤 들어야 하는데, 지난날 군부독재 때이든 오늘날 민주주의 때이든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집회나 시위를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하나, 거의 모든 집회와 시위는 '불법' 딱지를 받으면서 몽둥이찜질을 받고 붙잡아 가둡니다.

 

 곰곰이 살피면, '억누르는' 법만 판치는 우리 삶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법만 떠도는 우리 터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를 '못살게 구는' 법만이, 사람이 사람을 '들볶는' 법만이, 내가 너를 '옭아매는' 법만이, 네가 나를 '옥죄는' 법만이, 힘있는 이가 힘없는 이를 '짓밟는' 법만이 감돌고 있는 우리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ㄴ. 대화와 얘기

 

..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대화하자",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참으로 좋은 얘기입니다 ..  《지학순-정의가 강물처럼》(형성사,1983) 227쪽

 

 "대화를 통(通)하여"는 "대화로"로 고치고, "문제를 해결(解決)하자"는 "문제를 풀자"로 고쳐 줍니다.

 

 ┌ 대화(對話) :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   - 저자와의 대화 / 대화 도중에 끼어들다 / 대화의 실마리가 풀리다 /

 │     대화를 나누다 / 대화가 오고 가다

 │

 ├ 대화하자

 │→ 이야기하자

 │→ 말로 하자

 ├ 대화를 통하여

 │→ 이야기를 하며

 │→ 말로

 └ …

 

 '참으로 좋은 얘기'라고 하는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소리라고 합니다. "대화하자" 같은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합니다.

 

 따옴표를 친 자리에는 '대화'라고 두 번 적습니다. 따옴표를 치지 않은 자리에는 '얘기'라고 두 번 적습니다.

 

 빙긋 웃으면서 생각합니다. 이야기이고, 얘기이고, 말이고, 소리입니다. '얘기'는 '이야기'를 줄인 말이고, '말'과 '소리'는 때때로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대통령하고든 선생님하고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아버지하고든 어머니하고든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입니다. 동무하고든 사랑하는 사람하고든 '이야기'를 건넬 뿐입니다.

 

 ┌ 저자와의 대화 → 지은이와 얘기하기

 ├ 대화 도중에 → 이야기하는 사이에

 ├ 대화의 실마리가 → 이야기 실마리가

 ├ 대화를 나누다 → 이야기를 나누다

 └ 대화가 오고 가다 → 이야기가 오고 가다

 

 '이야기'를 한자로 옮겨적은 '對話'라는 낱말을 곱씹어 봅니다. '이야기'가 되든 '대화'가 되든, 우리들은 주먹이나 어떤 힘이 아니라 서로서로 부드럽게, 싸우지 않고 어떤 일을 해 나가자는 목소리요 몸짓입니다. 서로서로 슬기롭고 따뜻하게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자는 다짐이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 한다면, 뜨거운 피만 흐르는 살덩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넋과 얼로 우리 몸뚱이를 감싸는 사람이라 한다면, 내 생각과 네 생각이 하나될 자리를 말마디와 글줄로 나누자고 하는 움직임이요 만남입니다.

 

 날마다 말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거나 집니다. 그리고, 말 한 마디로 사랑을 얻거나 잃습니다. 말 한 마디로 믿음을 사거나 잃습니다. 말 한 마디로 아름다움을 꽃피우거나 못남을 불러들입니다.

 

 ┌ 대화 / 대담 / 인터뷰 / 강의 / 강론

 └ 이야기 / 이야기나눔 / 말 / 말나눔

 

 이야기는 혼자서 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마주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마주이야기'라는 말을 지어내어 쓰는 분이 있습니다만, '마주이야기'라는 낱말은 우리들이 쓸 수 없습니다. 엉터리 겹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한자말 '대화'를 풀이하며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 적어 놓지만, "마주보며 말을 주고받음"으로 적으면 모를까, "마주 대하여"라는 풀이말을 넣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말풀이를 찾아보면, 이야기를 "마주 나누는 말"로 풀이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말'이 무엇이고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누지 않은 탓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이야기'를 살피지 않은 탓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이건 글이건 이야기이건 소리이건 젬병이 되다 보니까, '이야기'를 한자로 옮겨 '대화'였는데, 한자말 '대화'를 토박이말로 풀어낸다면서 '마주이야기'라는 억지말을 지어내고 맙니다. 그러면서 마치 '대화'나 '대담'은 높은 말인 듯 여깁니다. 어르신하고 나누는 말일 때에는 '대화'나 '대담'을 쓰고,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말이라면 '강의'나 '강론'이라 하며, 사람들이 서로 만나 나누는 이야기를 '인터뷰'라고만 가리키고 맙니다.

 

 곰곰이 따지면 '이야기나눔'이라 하지 않고 '이야기'라고만 해도 됩니다. 아니면, '이야기자리'나 '이야기마당'이나 '이야기터'라고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북돋우거나 키운다면, 마땅히 우리 말에 사랑과 믿음을 담을 테고, 이렇게 사랑과 믿음을 담으면서 차근차근 우리 생각줄기를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북돋우지 않고 키우지도 않는다면 우리 생각줄기를 가다듬지 못합니다. 언제나 바깥에서 어설프거나 설익은 말마디를 들여올 뿐이고, 어줍잖거나 낯선 글줄을 끌어들일 뿐입니다.

 

 제 말이 없고서야 제 생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제 글이 없고서야 제 넋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이야기가 없고서야 제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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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11:33ⓒ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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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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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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