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각하, 이놈이 이철의 애비입니다"

김갑수 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제4회) '과거와 미래' 편

등록 2009.07.09 12:02수정 2009.07.0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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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은 불현듯 피의자 신문조서만으로 여덟 명을 기소, 사형시켰다는 인혁당 사건을 떠올렸다. 용 부장은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엷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부장님!"

용 부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됩니까?"
"아는 걸로 물어 봐 줘."

"인혁당 사건에 대해 잘 아시나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일어난 일이지."

"민청학련과 인혁당은 정말 관련이 있었나요?"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해. 다만 그 당시 민청학련 주모자 급인 이철이나 유인태, 이강철 같은 사람들은 인혁당 사람들을 정보부에서 처음 보았다고 증언했더군."

"그렇다면 민청학련과 인혁당은 관련이 없는 거군요."
"그렇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이철이나 유인태라면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했던 사람들 아닌가요?"
"이강철도 마찬가지지."


"그 사람들은 얼마 후 풀려났다면서요?"
"처음에는 그 사람들도 사형 언도를 받았어."

"그랬나요?"
"재미난 일화가 있어. 아마 조 팀장은 모를 거야."


"저는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제가 태어날 때 생긴 일이잖습니까?"

용 부장은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만은 알지?"
"박정희 대통령 아들 말입니까?"

"그때 박지만이 중앙고등학교 학생이었거든. 큰누나 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고 작은누나 박근영은 서울음대 작곡과에 재학 중이었지. 참, 박근영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경기여중고를 나왔어."
"공부들을 잘 했군요?"

"박근영은 미술 특기생으로 경기여중고를 다니다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진학했으니까 예능에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다고 봐야지."

용 부장은 빙긋이 웃었다. 조수경도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겠군요."
"암. 그렇지. 아무튼 당시 대통령은 서울음대와 중앙고등학교 학부모였어."

"그렇군요."
"서울음대 교수 중에서는 청와대에 박근영이 레슨 하러 다닌 사람도 있었고."

"어머! 그런 일이 가능했나요?"
"역시 조 팀장은 신세대군. 하지만 나는 서울음대가 아니라 중앙고등학교 얘기를 하려고 해. 하루는 박 대통령이 외아들의 학교를 방문했대.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앙고등학교 교사 중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서울 문리대생 이철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거야."

조수경은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다음 이야기에 상관없이 그 정황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저리고 긴장되었다.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란 조수경으로서는 일순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대학생 사형수의 아버지는 두 손으로 대통령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고 했다.

"각하, 이놈이 이철의 애비입니다."

순간 대통령의 미간이 아스라이 꿈틀거렸고 이어서 대통령은 그 교사의 손을 힘없이 놓아 버렸다고 했다.

용 부장은 대화를 끝내며 말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 문리대 내 선배한테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니까."

용 부장이 방에서 나간 후에도 조수경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지독히도 절망적이고 처절한 상황이었을 터였다. 아들이 죽게 된 사태를 부모가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였을는지? 조수경은 그것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 들었다. 다행히 이철은 이듬해 풀려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수경의 눈가에 물기가 배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리워진 것이었다. 그것은 예전에는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언저리의 눈물을 닦았다.

"각하, 조수경이 내 딸입니다."

조수경은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남자 어른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조수경은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유리창에 투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처연히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제사가 끝나고 외삼촌과 외숙모가 돌아간 지도 한 시간 남짓 된 것 같았다. 지난 30년 동안 그녀에게 아버지의 제사는 추상적인 의식(儀式)에 불과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제사 지내는 일은 얼굴을 본 고조할아버지를 제사하는 일보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적인 존재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한 이미지로 그녀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파란 죄수복을 입고 사형을 기다리는 피의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외삼촌이었다. 외삼촌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수경아, 오늘은 네 아빠 이야기를 하기로 엄마와 합의를 보았다. 나는 진즉부터 해야 한다고 했지만 네 엄마가 반대해서 하지 않은 이야기다. 네가 경찰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신원조회로 애를 먹은 일이 있다는 것을 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인혁당 사건 재심이 처음 열렸다. 인혁당 사건 알지?"

순간적으로 조수경은 외삼촌이 어떤 말을 하리라는 것을 직감해 버렸다.
#이철 #인혁당 #민청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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