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람이 한국을 담아낸' 사진책 얼마나 보셨어요?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43] 케사하루 이마이 <38도선 이쪽자리>과 서울 '뿌리서점'

등록 2009.07.31 18:00수정 2009.07.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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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닐곱 해 앞서 있던 일입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용사의 집'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에서 한참 책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른 책손이 〈뿌리서점〉 아저씨하고 책값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손은 퍽 지나치게 에누리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다른 책손이 끼어들어 묻습니다. "여보시오. 댁은 이곳에 얼마나 다녀 보셨기에 이곳 단골이라고 말하시오?" "저요? 한 해에 한두 번은 오지요." "떼끼! 그런 사람이 무슨 단골이야? 헌책방 〈뿌리서점〉 단골이라고 하면 이곳을 이십 년쯤은 다니고 책은 오천 권쯤은 사야 비로소 단골이라고 할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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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뿌리서점>에는 일본책이 퍽 많이 꽂혀 있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 <뿌리서점>에는 일본책이 퍽 많이 꽂혀 있습니다. ⓒ 최종규

 

 두 책손이 나누는 목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에, 눈으로는 책을 좇으면서도 귀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무렵은 제가 헌책방 〈뿌리서점〉을 다닌 지 열두어 해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2009년으로 치면 저는 〈뿌리서점〉 열일곱 해 손님입니다. 아직 스무 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사들인 책은 만 권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러나 햇수는 스무 해를 채우지 못했기에 저 또한 섣불리 '헌책방 〈뿌리서점〉 단골입니다' 하는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어느 한때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만, 헌책방 〈뿌리서점〉에서는 이런 흥정이 곧잘 있습니다. 헌책방이라는 데는 무턱대고 에누리를 많이 해서 싸구려로 책을 사들여야 하는 줄 잘못 아는 사람을 따끔하게 나무라는 '어르신 책손'이 있는, 나라안에 보기 드문 소담스러운 책쉼터가 〈뿌리서점〉입니다. 〈뿌리〉 아저씨는 책값 셈을 할 때면 으레 "자, 민족의 이름으로!"라고 읊으며 천 원이든 이천 원이든 먼저 에누리를 해 주곤 합니다. 그렇게 눅은 값으로 책을 베풀며 "허허, 돈 많이 벌어서 헌책방 빌딩을 세워야 할 텐데!" 하고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이제까지 〈뿌리〉 아저씨가 책손한테 베푼 에누리를 모은다면 여러 억은 넉넉히 넘을 테니, 헌책방 빌딩을 짓고도 남아 헌책방 마을을 조촐히 꾸밀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러니까 제 어줍잖은 열일곱 해 어설픈 책손 깜냥으로 보면, 헌책방 〈뿌리〉 아저씨는 '책 판 돈으로 우뚝 솟을 건물은 못 짓지'만(처음부터 이렇게 할 마음은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넉넉히 베풀면서, 이 책으로 책손들 마음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논밭을 일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처음부터 이 마음이었다고 느낍니다). 책은 마음밥이라 하니, 책손 스스로 마음밥을 알뜰히 챙길 수 있게끔 마음논과 마음밭을 한 뙈기씩 나누어 주셨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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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38선 이쪽 자리> ⓒ 최종규

사진책 <38선 이쪽 자리> ⓒ 최종규

 

 케사하루 이마이(今井今朝春) 님 사진으로 엮은 《38度線のこちら側》(1971)이라는 사진책을 만나던 그때에도 그랬습니다. 〈뿌리〉 아저씨는 책값을 책밑에 연필로 숫자로 적어 놓는데, 사진책 《38度線のこちら側》 밑에는 '20'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요 녀석은 책값이 이만 원이요!'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책값을 셈하는 자리에서 〈뿌리〉 아저씨는, "허허, 최 선생은 헌책방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데 싸게 드려야지." 하면서 '20'에서 자그마치 '10'이나 덜어내었습니다.

 

 이렇게 책값을 싹둑 자르는 일은 퍽 드뭅니다. 저로서는 대단히 고마운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다른 책손보다 더 애써서 제 마음밭에 너른 이야기꽃을 피우고 꿈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곤 합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이음고리는 아니지만, 제 마음자리에 책씨와 사랑씨가 뿌려졌으니, 이 씨앗을 고이 거두고 돌보면서 저부터 더 아름답고 싱그러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몫이 주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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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때때로 '38선 북쪽 군인'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 최종규

속그림. 때때로 '38선 북쪽 군인'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 마실을 마치면서 잔뜩 무거워진 가방을 어깨에 질끈 메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도 이렇게 고마운 책과 마음을 받았는데, 이렇게 고맙게 받은 책과 마음을 내 삶에서 어떻게 다시 곰삭이며 살아내는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집에 닿아 찬물로 씻고 나서 책을 닦습니다. 흔들리는 전철에서 시달리며 돌아오는 길에는 헌책방 마실을 하며 고른 책을 꺼내어 듭니다. 두 눈에 불을 켭니다. 책 하나하나 속속들이 가슴에 새깁니다. "스무 해 오천 권" 소리를 듣던 그날 알아본 사진책 《38度線のこちら側》을 흔들리는 전철에서 눈을 밝히며 펼치고 넘깁니다. 책방에서 한 번 다 넘겼고, 집에 닿기 앞서 전철에서 다시 넘겼으며, 집에 닿아 걸레로 책을 닦으며 거듭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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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고아원 어린이 사진이 이 두툼한 책에 꼭 두 장 깃들어 있습니다. 두 장 가운데 하나에는 한쪽을 비우고 비둘기를 살짝 넣어 주었습니다. ⓒ 최종규

속그림. 고아원 어린이 사진이 이 두툼한 책에 꼭 두 장 깃들어 있습니다. 두 장 가운데 하나에는 한쪽을 비우고 비둘기를 살짝 넣어 주었습니다. ⓒ 최종규

 

 《38선 이쪽 자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사진책은,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남녘땅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려고 엮은 책입니다. 그런데 1960년대 대한민국 남녘땅 모습은 온통 '총칼을 든 군인'들뿐입니다. 남자도 군인, 여자도 군인입니다. 또는, 군인과 다를 바 없이 말없이 일하는 공돌이와 공순이. 또는, 기생관광을 이끌어 주는 듯한 아리따운 한복 차림 아가씨. 드문드문 골목길 아이들.

 

 그무렵, 1960년대 "38선 저쪽 자리"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가 볼 수 없었고 살아 볼 수 없던 "38선 저쪽 자리" 또한 오로지 군인투성이에다가 '가난하고 어두운 자리는 뒤로 숨기려는' 모습이었을까요?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서울 청계천 가난한 삶터를 틈틈이 담다가 남녘에서 쫓겨났는데, 케사하루 이마이 님은 고아원과 골목길을 용케(?) 잡아채어 사진책에 실었습니다. 이이도 이 사진책 때문에 남녘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을까요? 아니면, 다른 숱한 군인들 사진들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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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정권이 '발전-번영'한다는 상징으로 청계천고가도로를 찍도록 했을 테지요. ⓒ 최종규

박정희 독재정권이 '발전-번영'한다는 상징으로 청계천고가도로를 찍도록 했을 테지요. ⓒ 최종규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09년 8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7.31 18:00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09년 8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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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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