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용춘공.
MBC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 따르면, 애당초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남편감으로 점찍은 인물은 진지왕의 아들이자 덕만의 오촌 당숙인 용춘이었다.
하지만, 용춘은 덕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극구 사양해 보았지만, 왕명을 어길 수 없어서 덕만과 밤을 함께 하곤 했다. 물론 현대적 개념의 혼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진평왕이 덕만과 용춘을 이어준 목적은 용춘이 덕만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용춘은 한편으로는 덕만의 연인 역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덕만의 정치참모 역할을 했다. 연인 겸 참모가 되는 것은 이후 덕만의 다른 남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자 후계자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의식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덕만에게 마음이 없었던 용춘은,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덕만공주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자 진평왕은 할 수 없이 용춘의 형인 용수에게 덕만을 모시도록 했다.
덕만과 용수 사이에서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용수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덕만은 다시 홀몸이 되고 말았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덕만은 계속해서 '솔로' 혹은 '골드미스'로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덕만이 다시 남자를 얻은 것은, 죽은 아버지를 이어 즉위했을 때의 일이었다. 왕이 된 덕만은 옛 남자인 용춘을 불러들여 정식 남편으로 삼았다. 이때 여왕의 남편은 단순히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사실상의 국정 책임자가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용춘은 덕만의 곁을 떠나고 싶어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을제라는 인물이 역사기록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그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서 각각 한 번씩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왕의 정식 남편이 된 직후에 용춘이 '이혼 의사'(남편으로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퇴 의사'(정치참모로서)를 피력하자, 이에 당황한 신라정부에서는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 남편의 제도'(三婿之制)라는 것을 만들어 두었다.
세 남편 제도란?'세 남편의 제도'란 용춘 외에 두 명의 '부(副)남편'을 더 두어 총 세 명의 남자가 여왕을 모시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때 흠반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남편'에 오른 인물이 바로 을제였다.
참고로, <화랑세기>의 이 대목과 관련하여, 어느 유명한 <화랑세기> 번역본에 작은 '실수'가 있어서 독자들의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음을 알려두고자 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본문에서 삼서지제(三婿之制)의 뜻을 풀이하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제시한 다음에, 각주와 용어설명 코너를 통해서 서(婿)를 '사위'의 의미로 풀이했다.
그러나 서(婿)는 사위 외에 '남편'의 뜻으로도 사용되는 글자였다. 후한시대(25~220년)의 허신이 만든 유명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에서는 "여자의 남편을 서(婿)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삼서지제가 제정된 시점은 진평왕이 사망한 이후였으므로, 용춘·흠반·을제를 누군가의 사위라고 표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위 대목의 서(婿)는 사위가 아닌 남편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타당하다.
용춘이 선덕여왕의 곁을 떠날 경우에 대비해서 신라정부가 '세 남편의 제도'를 만들어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용춘이 결국 여왕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전'인 용춘이 퇴장함에 따라 두 명의 부남편 중 누군가가 용춘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이때 흠반을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찬 인물이 바로 을제였다. <화랑세기>에서는 "선덕이 정치를 을제에 맡기면서(善德乃委政于乙祭) 공(용춘)에게 물러나 살 것을 허락했다(*而許公退去")고 말한다. 이는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을제가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을제, 선덕여왕의 정치참모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