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내 삶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44] 《이야마 하루오-この角を曲がれば》와 <헌책백화점>

등록 2009.09.09 11:35수정 2009.09.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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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この角を曲がれば (이 모퉁이를 돌면)
- 사진 : 이야마 하루오(伊山治男)
- 펴낸곳 : 地方公論社 (2002)

다섯 해 앞서인 2004년 여름에는 아직 서울에서 살고 있는 가운데 서울과 충주 산골짜기를 오가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마다 서울과 충주를 오가는 고단한 길에서 틈틈이 헌책방마실을 했고, 서울 청구초등학교 둘레에 자리한 〈헌책백화점〉에서 일본 사진책 《この角を曲がれば》를 만났습니다. 이 사진책은, '모리오카(盛岡)'라고 하는 일본 도시 한 곳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큰 사진(예전 모습)'과 '작은 사진(오늘날 모습)'을 나란히 놓으면서, 사진쟁이 고향마을 삶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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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사진쟁이가 당신 고향을 담아낸 알뜰한 책입니다. ⓒ 최종규


그러나 저는 이 사진책을 처음 장만하던 2004년 여름부터 그러께까지는 이 사진책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퍽 잘 찍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가슴에는 깊이 새겨 놓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세월 흐름에 따른 삶이 담긴 사진'을 알아내거나 읽어낼 가슴이 아직 저한테 닦이지 못한 탓입니다. 그저, 누구라도 한 곳에서 오래오래 살면 이만한 사진책쯤 묶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이만한 사진책을 묶어낼 수는 있어도, 거의 어느 누구도 이만한 사진책을 묶어낼 마음을 품지 않고, 이만한 사진을 애써 찍어도 힘껏 펴내어 주려는 손길을 만나기 어렵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사진쟁이가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빛을 보기 마련이고, 스무 해든 서른 해든 오랜 세월에 걸쳐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터전'이 어떻게 흘러오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은 평론가들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일쑤일 테지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쟁이 한 사람이 온삶을 고이 지낸 한 동네 흐름까지 잡아채거나 느낄 수 있는 가슴과 눈썰미가 있는 평론가란 거의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 고향 터전을 사진으로 찍어서는 필름값 건지기마저 힘들 뿐더러, 필름값 건질 생각은 꿈꿀 수 없습니다. 그저 찍고 또 찍고 다시 찍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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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은 큰 사진으로, 요즘 모습은 작은 사진으로 넣어서 견줍니다. 허물고 바뀌는 모습에는 '작은 판 요즘 모습'이 없습니다. ⓒ 최종규


서울 청구초등학교 옆에 자리한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이 사진책을 값싸게 팔아 주었습니다.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다른 책들도 으레 값싸게 팔아 주시곤 하는데, "싸게싸게 줄 테니까, 좋은 책 많이많이 사 가시고, 훌륭한 일도 많이많이 하소서!" 하는 말씀을 덧붙이곤 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퍽 값있는 책이 있고, 대단히 뜻있는 책이 있지만,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앞서, 당신은 당신 스스로 더 많은 책을 장만해서 갖추어 놓고, 이렇게 갖추어 놓은 책들을 좀더 값싸게 팔면서 책이 술술 흐를 수 있으면 좋다고 여기십니다. 저로서는 주머니 걱정을 덜 하게 되니 고마울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무리 헌책이라 하더라도 너무 값싸게만 판다면, 책이 제 임자를 못 찾아가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책이 책이라기보다 '값싼 물건'이 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와 함께 헌책방마실을 다니는 옆지기는 으레 "책을 살 때에는 책값은 나중에 따지고, 그 책이 지금 우리한테 꼭 있어야 하는 책인가를 따지거나 당신이 그 책이 꼭 마음에 드는가를 살피셔요"하고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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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하니 예쁜 옛 집이 사라지기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도 합니다. ⓒ 최종규


지난 2007년 4월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부터, 《この角を曲がれば》를 책시렁에서 틈틈이 뽑아들어 새삼스레 펼쳐 봅니다. 제 일터인 도서관에 찾아오는 손님들한테도 넌지시 건네며 구경을 시킵니다. 스무 해 사이에 뚝딱하고 달라진 '모리오카'라고 하는 동네 삶자락을 사진마다 고이 느낍니다. 이 책이 나온 지 스무 해째 되는 해에는 또 얼마나 달라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무 해 사이에 뚝딱하고 달라진' 모습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듭니다. 스무 해 앞선 때까지는 오래도록 이대로 이어왔을 테며, 지난날에는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사람들 삶터가 뒤바뀌는' 일이란 없었으니까요. 더구나, 모리오카라고 하는 동네에는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가 살던 집이 예전 모습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 있는 가운데, 사라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지켜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この角を曲がれば》를 죽 넘겨 보면, '옛날과 오늘날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모습이 퍽 많은 가운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름없다'는 모습도 제법 많습니다. 오래되었다고 섣불리 헐지 않으며, 낡았다며 어줍잖이 몰아내지 않습니다. 또한, 오래되었다고 반드시 역사가 깊다 할 수 없습니다. 발자국이 얕아도 사람들 손품과 손때가 짙게 탄 터전이라면 가없이 아름답고 애틋합니다. 발자국이 깊어도 사람들 다리품과 땀방울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며 애틋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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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은 한국과 달리 옛 집을 잘 간직하는 데도 많아요. 이런 대목에서는 우리가 깊이 돌아보고 배워야지 싶습니다. ⓒ 최종규


아기를 안고, 또는 아기를 업고 옆지기 손을 잡으며, 때로는 혼자서 자전거를 몰면서 골목마실을 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가끔 인천에 놀러와 '골목 풍경' 몇 점을 찍고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데, 우리는 날마다 이 길을 새로 걸으며 우리 삶터를 찍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똑같으면서 다른 우리 삶'을 담습니다. 삶이 없이 추억이란 없고, 삶이 없이 이야기란 없습니다. 삶이 없이 일놀이란 없고, 삶이 없이 사진 또한 없습니다. 녹아들고 배어들고 스며들다가는 곱고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삶입니다.

― 서울 청구초 옆 〈헌책백화점〉 : 02) 2252-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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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모습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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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마련한 오래된 신발장은, 오래된 학교 건물과 함께 재개발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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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학교는 운동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모이는 조촐한 운동회도 사라집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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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은 밑자리 사진이 아예 없습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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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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