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의 절규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잊혀진 저항 10.28 건대항쟁] 전두환 정권은 왜 대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나

등록 2009.10.25 17:41수정 2009.10.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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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대항쟁은 1447명 연행 1288명의 구속이라는 사상초유의 기록을 낳았다. 독재정권에 의해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빨갱이로 매도되어야만 했다. ⓒ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1986년 10월 28일.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이를 위해 반공이데올로기 분쇄와 전두환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던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건국대로 향했다. 대학가의 검문이 매일 같이 이어지던 때 아무런 검문 없이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은 순조롭게 건국대에 모일 수 있었다. 으레 그렇듯 화형식을 거행했고 대학생들은 해산을 준비했다. 이때 경찰은 기습작전을 전개한다.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캠퍼스에 갇힌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건국대학교 캠퍼스 건물로 쫓겨 농성을 시작한다.

농성을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과 음식조차 준비하지 못했던 대학생들은 건물을 지키며 밤을 지샜다. 그들은 안전귀가요청만 받아준다면 자진해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애초에 농성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범죄를 전제하는 경찰의 '자수' 요구에 그들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1986년 10월 29일.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기자가 몰래 전달해 준 신문을 접하고 경악하게 된다. 5.18을 묵인했던 언론보도와 강압적인 보도지침을 꿰뚫고 있는 대학생들이었기에 언론보도에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공산혁명분자 건국대학 점거 난동 사건'이라는 보도는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들은 민주화와 통일을 외쳤을 뿐 공산혁명분자가 아니다. 또한 그들은 대학을 계획점거한 것이 아니다. 경찰에 쫓겨 건물내로 진입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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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당시 동아일보 보도 이 보도기사에는 사실과는 다른 "북괴 대남선동 그대로 따라"라는 부제와 "유인물 들 친공성향 중시" 등의 내용으로 대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 mbc



대학생들을 공산혁명분자로 매도한 전두환 정부

점거농성 당시 신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타전했다. '건대에 6.25찬양', '좌익용공세력 건대 계획점거농성', '북한 적극찬양'. 방송사는 연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급진좌경세력은 배격되어야 하나'와 같은 특집보도를 내보냈다.

사건 직후 소집된 131회 국회 본회의에서 김종호(당시 내무부 장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이것은 단순한 좌경적 차원이 아니라 마치 공산폭력혁명이나 적화통일을 획책 방조하는 도시게릴라를 보는 것 같아 슬픔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131회 내무위원회에서는 강민창(당시 치안본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은 3단계 적화통일전략의 제1단계를 넘어선 반국가적 책동이라고 볼 수 있다."

1986년 11월3일. 검찰 중간수사발표는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이번 사건을 공산혁명분자 건국대학 점거 난동 사건으로 명명하고 연행자의 신병처리 방침을 발표했다.

2002년 2월 17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건국대 농성 사건> 편에 따르면 경찰측은 가장 큰 근거로 애학투련 대학생들이 썼던 대자보에 표현된 "진달래꽃 머리에 꽂고 온민족이 하나가 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라는 표현을 문제삼았다고 한다. 이 문구는 북한 가극 <피바다>의 대사이며 이를 인용했기 때문에 친북, 이적세력이라 칭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피바다>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다고 한다.

또한 이날 방영분에는 취재과정에서 보도지침을 전달받는 기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입수한 대자보와 유인물 중 "Ugly 한 것은 모두 받아쓰라는 지침이 있었다"라는 녹취를 들을 수 있다. 농성 대학생들이 음식을 배분한 것 까지 공산주의 사상에 의거한 것이라는 억지춘향식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이는 애학투련 대학생들이 집결하는 것을 방임한 후 건국대학교 건물 안으로 토끼몰이식으로 몰아넣고 그들을 빨갱이로 만드려는 명백히 의도된 사건의 전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건대항쟁 매도와 금강산댐 수공설은 장기집권의 포석

사건 직후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댐 수공설'을 발표하게 된다. 금강산댐 수공설은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축할 것이며 금강산댐의 물을 한번에 방류할 경우 서울과 중부지방이 물에 잠긴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 사건의 여파는 전국민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연인원 천만 명에 달하는 북한 규탄 시위는 당시 반공정서를 극대화라는 효과를 발한다. 훗날 금강산댐 수공설은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진다.

건대항쟁은 금강산댐 사건의 사전포석이었다. 계획된 조작을 근거로 한 치밀한 언론플레이로 반공정서의 고취를 노렸던 것이다. 때문에 1447명의 연행자, 1288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구속은 공산혁명 분자들이 대대적으로 발호했다는 뉘앙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후 금강산댐 사건으로 반공논리를 극대화 시킨다. 이를 통해 전두환정권이 근본적으로 의도한 것은 북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군사정권이며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을 이끌 적임자라는 것이다. 즉 금강산댐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의 포석으로 사용되었고, 건대항쟁은 금간산댐 사건을 앞둔 전초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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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댐 건설 서울시민 규탄대회. 이때 반공시위 1000만명의 인원이 참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지는 드라마 제5공화국의 자료화면. ⓒ mbc


건대 항쟁 당시 건대신문 기자로서 건대항쟁을 취재했던 민주당 정청래 전 의원은 2005년 건대 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대항쟁에 참여한 학생들을 모두 빨갱이로 매도해 버리는 언론의 횡포를 보면서 분노를 느꼈었죠. 1987년 전두환 정권의 2기 집권을 위해 건대항쟁을 희생물로 악용한 것이죠. 건대항쟁은 독재와 반민주화의 대상이었던 전두환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들이 충돌한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66시간동안 가두어 놓고 언론을 통해 국민들을 호도하려고 했었습니다."

2009,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언론보도를 접한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건물 옥상에서 주민들을 향해, 기자들을 향해 3박4일 내내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차별적 진압아래 희생당했고, 기본적인 치료와 가족들의 면회조차 박탈당한 채 구속당해야 했다. 이 중 90명은 실형을 살았고 23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되었다. 단순가담자로 판명된 상당수는 풀려나기도 했지만 빨갱이의 덧칠은 이들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게 되었다. 이후 건대항쟁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대학생 진성일씨가 분신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건대항쟁을 치밀하게 조작했던 이들은 5.18 광주 민주화항쟁이 그랬듯 책임지는 이 하나 없이 막을 내린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과거 군부의 핵심이었던 자들은 애학투련 대학생들에 대한 공식 사과나 유감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국민 학살과 간선제 방식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부족한 정통성은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명맥을 유지했고 당시 대학생들은 반공이데올로기의 분쇄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그릇됨을 알려 민주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전국민적 의식속으로 파고된 반공정서에서 반공이데올로기 분쇄라는 구호는 공산주의 찬양으로 매도할 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2009년, 23년이 흘렀고 역사는 건대항쟁을 기억하지 못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잠깐이나마 재조명되긴 했으나 그 시절 대학생들을 매도했던 대다수의 권력과 언론은 여전히 침묵상태다.
#10.28 건대항쟁 #10.28 #건대항쟁 #전두환 #애학투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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