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31) 그녀 9

[우리 말에 마음쓰기 787] 짐승을 가리키며 넣은 '그녀'란...

등록 2009.10.30 10:43수정 2009.10.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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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암고양이 마돈니나와 '그녀'

 

.. 암고양이 마돈니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농가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엘케 하이덴라이히-검은 고양이 네로》(보물창고,2006) 9쪽

 

 '농가(農家)'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농삿집'으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前)" 또한 그대로 두어도 되나, "아주 오랜 옛날"이나 "아주 예전"으로 다듬으면서 한자말 '前'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는 말투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요모조모 살피고 헤아리면서 한결 알맞거나 싱그럽게 우리 말투를 북돋우거나 살찌울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뜻과 느낌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우리 말살림을 일구거나 가꿀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녀의 나이를 아는 사람

 │

 │→ 암고양이 마돈니나 나이를 아는 사람

 │→ 그 암고양이 나이를 아는 사람

 │→ 마돈니나 나이를 아는 사람

 └ …

 

 세월에 따라 말이며 글이며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키는 대이름씨 또한 달리지리라 봅니다. 지난날에는 안 쓰던 대이름씨를 오늘날에는 새롭게 써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라는 대이름씨가 있으나 거의 쓰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그녀'라는 대이름씨가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식인들 글에 묻어 들어왔고, 이제는 널리널리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 말은 서양말과 달리 '그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 없고, 굳이 3인칭 대이름씨를 쓰지 않았으나, 오늘날 흐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이든 아니든 따질 까닭이 있느냐? 사람들이 널리 잘 쓰면 우리 말 아니냐?' 하는 목소리가 좀더 힘이 있습니다. 그래, '그녀'를 쓰건 말건 쓰고픈 사람 마음입니다.

 

 ┌ 암고양이 마돈니나 (o)

 └ 그녀의 나이 (x)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글머리에는 "암고양이 마돈니나"라 했다가 뒤에서는 암고양이를 가리켜 '그녀'라고 합니다. 대이름씨 '그녀'는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 썼는데, 이제는 어린이들이 읽는 문학에마저 짐승을 가리키는 자리에까지 씁니다.

 

 제가 읽은 책이 얼마 없어서인지 몰라도, 저는 2004년에 '짐승한테도 그녀라는 대이름씨를 붙인 글월'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 읽은 책은 미국사람이 쓴 책이었고, 우리 말로 옮긴 분은 '뱀장어'를 '그녀'로 가리켰습니다. 여느 사람들보다 어린이책을 좀더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다 읽지는 못하는데, 아무래도 제 손길을 타지 않았던 어린이책에는 수없이 '그녀'가 쓰이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책을 읽으면서도 '그녀'를 만나지만, 만화영화에서도 '그녀'를 만납니다. 집에서 엄마아빠 할매할배하고 연속극을 함께 보면서 방송에서도 '그녀'를 듣습니다. 중학생이 되면 아주 거리낌없이 온갖 곳에서 '그녀'를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에 으레 '그-그녀'를 읊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분 책이었는지 이름을 잊었는데, 우리네 영어사전을 비판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며 "콘사이스 영어사전에서 'my'를 우리 말로 풀이하며 '나의'라는 풀이만을 달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영어사전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풀이가 가득이었고, 국어사전에서 겹말이나 얄궂게 잘못 적어 놓은 풀이보다 훨씬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요즈음 한국사람들은 한국말사전은 안 뒤적여도 영어사전은 으레 뒤적일 뿐 아니라, 영어사전을 거의 날마다 뒤지면서 영어를 익힌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 암고양이 마돈니나 나이

 ├ 암고양이 나이

 ├ 마돈니나 나이

 ├ 그 녀석 나이

 ├ 그 고양이 나이

 ├ 그놈 나이

 └ …

 

 얄궂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우리 말 빛깔을 올바로 느껴서 제대로 익히려는 사람보다는 서양말 빛깔을 우리 말에까지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이 제법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차츰차츰 더 늘어나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낱말도 말투도 말법도 우리 말 빛깔을 찾고 느끼려 하기보다는 서양 해바라기에 치우치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에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를 채 씻어내지 못하는 한편, 외려 나날이 더 많이 흘러들어오고 있어서, 우리 말은 아주 오사리 잡탕이 되고 마는 모습까지 봅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알맞고 깨끗하고 올바르며 손쉽게 생각하고 어우러지면서 일하고 놀고 쉬고 손잡는 흐름이 없어지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우리 말글 또한 이 흐름을 똑같이 타지 않느냐 싶습니다. 뒤죽박죽 엉터리 엉성궂은 멍청한 우리 말이 되든 말든 마음을 안 쏟는지 모릅니다. '그녀'든 뭐든, 갖가지 얄궂은 말이든 무엇이든, 말자랑하듯 함부로 집어넣고 뽐내는 온갖 영어 말투이든 일제강점기 낱말이든 군군국주의에 젖어 있는 말투이든,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습이 이러합니다. 숨길 수 없는 우리 모습이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 모습입니다. 우리 생각이 이러합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 생각이란 제 줏대가 없고 제 주제를 잃으며 제 깜냥을 버린데다가 제 슬기를 키우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저 같은 쥐대기 한 사람이 '그녀'라는 말마디를 안 쓰고, 이 말마디를 아무 데나 쓰는 일이 잘못임을 알려주려고 아무리 애쓴다 한들, 교과서 엮는 이나 아이들 책 엮는 이나 글을 쓰는 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나 아이를 키우는 이나 기자로 일하는 모든 이들이 '그녀'가 얼마나 말썽인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살갗으로 느껴 주기를 바라기 어려운 줄은 알지만 아예 쳐다보지 않습니다. 먼 하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없고 알려는 사람이 없어도 눈감고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한테는 알맞고 바르고 살갑고 싱그러워 빛나는 고운 말과 글이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물려주어야 하니까요. 우리 아이뿐 아니라 우리 둘레 뭇 아이들 모두한테 이 나라 어른 된 사람으로서 돌보고 남겨 이어줄 말과 글이 어떠해야 좋은가를 밝혀 주어야 하니까요. 어른들을 볼 때에는 빛이 조금도 없지만, 아이들을 보면서 하루하루 새힘을 냅니다.

 

 

ㄴ. 그녀 → 그 아이

 

.. 만일 17세의 독일 소녀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자란 그 환경에 던져 놓는다면 그녀는 어떨까? ..  《자비네 퀴글러-정글 아이》(이가서,2005) 13쪽

 

 "17세(歲)의 독일 소녀"는 "열일곱 살짜리 독일 소녀"라든지 "열일곱 살인 독일 소녀"로 다듬어 봅니다. "내가 자란 그 환경(環境)"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내가 자란 그곳"이나 "내가 자란 그 숲속"으로 손보면 한결 잘 어울립니다.

 

 ┌ 그녀는 어떨까?

 │

 │→ 그 아이는 어떨까?

 │→ 그 소녀는 어떨까?

 │→ 그 계집아이는 어떨까?

 │→ 그 사람은 어떨까?

 └ …

 

 보기글을 보면, 앞에서 '독일 소녀'라 했다가 뒤에서 '그녀'라 적어 놓습니다. 보기글이 실린 독일말로 된 책에서 뒤쪽 낱말을 'Sie'라고 적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외국말을 있는 그대로 우리 말로 옮긴다고 하다가 그만 '그녀'를 적어 놓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런저런 흐름을 살핀다면 이 글월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꼭 '그녀'를 넣어야 했는지, 우리로서는 달리 나타낼 낱말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깜냥껏 좀더 알맞고 슬기롭게 적바림할 글월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말을 차근차근 북돋우는 생각을 바라기 어려울까요. 우리한테는 우리 글을 하나하나 보듬는 매무새를 꿈꾸기 힘들까요. 그저 손쉽게 '그녀'를 붙이면 그만일 수 있고, 이런 글투야 너나없이 흔히 쓰니까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런 자리까지 꼼꼼히 짚다가는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쓴다는 푸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녀' 없이 내 생각을 나타내기란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이 말투에 익숙하다면. '그녀' 없이 문학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연속극을 찍기란 힘들는지 모릅니다. 여태껏 이 말투에 깊은 뜻과 마음을 바쳐 왔을 테니까요. 그런데, 참말 우리들은 '그녀' 없이 아무 일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사랑도 못하며 아무 이야기도 못 엮으며 아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살림살이인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0.30 10:43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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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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