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 한순간의 영감을 위해 시인이 무수한 고뇌의 밤을 지새듯, 1/125초의 한순간을 기다려 사진가는 무한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 <사진, 시간의 아름다운 풍경>(한정식,열화당,1999) 119쪽
"한순간의 영감(靈感)을 위(爲)해"는 "한순간 좋은 느낌(생각)을 얻고자"를 가리킵니다. 사이에 토씨 '-의'를 넣어서 잇고 있는데, "시인은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좋은 생각을 얻고자 수없이 괴로운 밤을 지새듯"처럼 앞머리를 추슬러 주면 어떨까 싶어요.
'무수(無數)한'은 '숱한'으로 다듬습니다. '무한(無限)한'은 '끝없는'이나 '그지없는'이나 '더할 나위 없는'으로 손봅니다.
┌ 인고(忍苦) : 괴로움을 참음
│ -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 그녀는 아들을 앞세우고 인고하며 살고 있다
│
├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 뼈를 깎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 뼈를 깎듯 애쓰며 살아야 한다
│→ 괴로움을 참으며 살아야 한다
└ …
보기글 앞쪽에 "고뇌(苦惱)의 밤을 지새듯"이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뒤쪽에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라는 대목이 나오고요. 한자말 '고뇌'란 "괴로워하고 번뇌함"을 뜻하는데, '번뇌(煩惱)'란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괴로워하고 번뇌함"이란 말뜻은 겹치기 풀이가 되고, 이런 풀이는 엉터리인 셈입니다. 또한, '괴로움'이란 "마음이 시달리며 가볍지 못함"을 가리키는 낱말이기에,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처럼 말풀이를 할 때에도 잘못입니다.
우리들은 국어사전을 펼치면서, 거의 모두 그저 그 책에 적힌 대로 읽고 새기고 생각하고 있는데, 옳지 않게 풀이된 이야기가 어떻게 어긋나거나 그릇되어 있는지를 곱씹지 않는다면, 국어사전을 펼치며 말을 배우기보다 국어사전을 펼치며 말이 망가져 버릴까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 또한 퍽 오랫동안 국어사전 말풀이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앞에는 '고뇌'이고 뒤에는 '인고'인데, 둘 모두 '괴로움'을 말하는 만큼, 앞뒤 모두 "괴로워 밤을 지새듯"과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로 다듬어 줄 수 있습니다. 또는, 앞쪽을 "살을 깎는 밤을 지새듯"으로 손보고, 뒤쪽을 "뼈를 깎는 시간을 보내야"로 손볼 수 있습니다.
┌ 인고의 세월을 → 괴로움을 참는 나날을 / 괴로운 나날을
└ 인고하며 살고 → 괴로움을 참으려 살고 / 괴로움을 이기며 살고
누구나 그러할 텐데, 괴로움을 참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이를 앙다물고 있어도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픕니다. 참고 또 참는다지만, 견디고 또 견딘다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오늘날 우리 말은 하루하루 괴로움을 참거나 견디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안 쓰고 있어서 엉망진창이 되고 있거든요. 맑고 밝게 말과 글을 다스리려는 사람이 드문 만큼 우리 말과 글은 하루하루 가시밭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에도 우리 말과 글은 언제나 괴로움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말에 짓밟혔습니다. 이에 앞서는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즐겨쓰던 한문에 짓눌렸습니다. 해방을 맞이하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영어에 짓이겨지는 가운데 한문이며 일본말이며 아직도 짓밟거나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말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더없이 용하다 할 만합니다. 아직도 우리 글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지없이 대단하다 할 만합니다.
말이 뒤죽박죽이 되고 글이 엉성궂게 된 우리 삶자락이지만, 이렇게나마 우리 말을 하고 우리 글을 쓸 수 있는 일은 여러모로 기릴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니, 예부터 이 땅에서 이 겨레와 함께한 말글은 어느 하루도 넉넉히 쉬거나 마음 놓으면서 아름다움을 뽐낼 겨를이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낮은자리 사람들하고 늘 어깨동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조용히 숨죽이면서, 어느 날엔가 싱그러이 꽃피고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ㄴ. 그 인고의 시간이
.. 넘버 2와의 인터뷰를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인간 타이거들과 소통하는 맛도 괜찮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이 좀 유난스럽게 폭발한 적도 있다 ..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이유경,인물과사상사,2007) 195쪽
"넘버 2(number two)와의 인터뷰(interview)를"은 "이인자와 인터뷰하기를"이나 "버금 우두머리와 만나기를"로 다듬어 봅니다. 이런 말마디는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왜 이렇게 써야 할는지, 왜 이러한 글투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아니 왜 이처럼 말장난 같은 말투로 내 생각을 담아내려고 하는지 돌아보면 안타깝고 씁쓸합니다. "인간(人間) 타이거"는 "사람 타이거"로 손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타이거'는 스리랑카 독재정권하고 맞서 싸우는 '타밀 타이거'라는 모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타이거'는 그대로 두면서, 이 앞에 붙인 '인간'만 '사람'으로 손봅니다.
'소통(疏通)하는'은 '만나는'이나 '이야기하는'이나 '사귀는'이나 '어울리는'으로 손질하고, '폭발(暴發)한'은 '터진'으로 손질해 줍니다.
┌ 그 인고의 시간이
│
│→ 그 괴로움을 참는 시간이
│→ 그 괴로움을 참다가
│→ 그 지루함을 참다가
│→ 그 지루한 괴로움을 참다가
└ …
글쓴이는 스리랑카 마실을 하면서, 그곳에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만나려 합니다. 그런데 날짜를 잡고 뭐를 잡고 하면서도 하루이틀 미적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당신하고는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도록 변변히 달라지는 낌새가 없자, 이런 나날은 설레는 기다림이 아니라 고단한 기다림이 되고, 끝내 괴로운 기다림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 그 괴롭던 기다림이
├ 그 지루한 기다림이
├ 그 괴롭도록 지루한 기다림이
└ …
괴로웠으니 괴로웠습니다. 고달팠으니 고달팠습니다. 두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낸 마음은 '괴로운 하루하루였다'고 나타내면 넉넉합니다.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진 나날은 '지루한 기다림만 이어졌다'고 이야기하면 알맞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하고 말하기를 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은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하지 않습니다. 꼭 한자말로 옷을 입혀 '인고' 같은 말마디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마디에 토씨 '-의'를 살며시 붙입니다.
┌ 그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
├ 그 고단하고 괴로운 나날이
├ 그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이
└ …
조금 더 살피고, 한 번 더 생각하며, 다시금 헤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꿈을 꿉니다. 말 한 마디이든 글 한 줄이든, 더욱더 돌아보고 되짚어 본다면 얼마나 기쁘랴 하고 바랍니다.
살뜰히 가꾸는 말이 된다면, 그러니까 살뜰히 가꾸려는 생각처럼 살뜰히 가꾸는 말이 된다면 더없이 고맙다고 느낍니다. 알뜰히 북돋우는 글이 된다면, 그러니까 알뜰히 북돋우려는 삶처럼 알뜰히 북돋우는 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0.31 10:24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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