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린 왕자>를 '막' 다시 읽었다. <어린 왕자>를 영문판으로 다시 읽은 것은 넉 달 전쯤의 일이고,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위해 한글판 <어린 왕자>를 몇 장 뒤적인다는 것이 마치 풍경이 멈춘 듯한 신묘한 힘에 이끌려 그야말로 끝장을 보고 만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나는 매번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아니, 그동안 내가 뭘 읽은 거지?" 하고 나 자신에게 묻곤 했는데, 그런 일을 가능케 한 나의 머리 나쁨에 대하여, 혹은 인간의 보편적인 망각에 대하여 어떤 비감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고마웠다. 이런 추세라면 몇 달, 아니 몇 주가 채 못 되어 어디 숨겨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이며 또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언젠가 <어린 왕자> 23장을 읽다가,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나라의 교육을 책임 질 장관을 뽑을 때 어린 왕자를 읽고 난 독후감을 써 보라고 주문하고 싶다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였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점원이 말했다.
그의 직업은 갈증을 덜어주는 알약을 파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알약을 하나만 먹으면 물을 더 이상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왜 이 약을 팔아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시간을 많이 절약해준단다. 전문가들이 계산한 바로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럼 그 53분으로 무엇을 해요?"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하고 싶은 중요한 일을 하지."
'만약 내게 53분이 남는다면 아주 천천히 샘으로 걸어갈 텐데' 라고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부러워한다는 우리나라에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책을 읽지 않고 누군가 써놓은 독후감을 읽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원하고, 그들의 부모가 더 강렬하게 원하는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사실은 그런 '꼼수'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하긴, 이제 그 좋은 대학도 대학의 본분인 학문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으니 이런 말들이 다 허망할 뿐이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의 효시라고도 생각해봄직한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삶에 대한 참된 인식과 생명에 대한 연민이라는 두 개의 주제가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는 탓인지 이번 <어린 왕자>와의 만남에서는 약한 존재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연민이 가득 스민 7장과 마지막 장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지 닷새째가 되는 날, 소설의 1인칭 화자인 '나'는 고장 난 비행기를 고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한 번 질문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어린 왕자는 그의 사정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꾸만 질문을 던진다. 지금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재발 그만 좀 하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어린 왕자는 슬픔을 토하듯이 이렇게 항변한다.
'내가 유별난 꽃을 알고 있다고 쳐봐. 오직 내 별에만 있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꽃이야.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어린 양이 그 꽃을 단 한 입에 먹어 치울 수도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말이야. 이게 중요한 일이 아니야? 어떤 소년이 어떤 꽃을 사랑한다고 상상해봐. 수백만 다른 별 어디에도 그런 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상상해 봐. 그러면 그 아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행복해할 거야.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어. 라고 중얼거리겠지.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그 소년은 별빛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낄 거야.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어린 왕자의 고향 별(소혹성B-612)에는 아름다운 장미가 살고 있다. 어느 날 홀연히 씨앗으로 날아온 그 꽃은 여느 수수한 꽃들과는 달리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지만 오만하다. 이내 그 꽃은 그 오만함으로 어린왕자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그로 하여금 고향별을 떠나 여행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피해서 별을 도망쳐 나온 뒤에야 자신이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갖게 해준 이는 지구의 사막에서 만난 여우이다. 여우는 '서로를 길들인다' 라는 의미를 어린 왕자에게 알려주고, 어린 왕자가 별에 두고 온 장미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는 지구 여행의 끝자락에서 만난 뱀의 도움을 받아 지구에 도착한 지 일 년이 되는 날 다시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 자존심이 강한 꽃이었을 뿐, 너무 약하고, 너무 순진하고, 겨우 보잘것없는 가시 네 개로 세상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을 장미를 생각하며 지구를 떠난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을 숨죽이며 지켜본 '나'는 어린 왕자가 지구를 떠난 뒤 어린 왕자의 양에게 재갈을 그려주었을 때 가죽 끈 그리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양이 꽃을 먹어버렸는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리고 독자인 어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하지만 내게는 어딘가 멀리 떨어진 별에서 양이 장미꽃을 먹었는지 혹은 먹지 않았는지에 따라 온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이토록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어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 나는 정녕 몰랐던 것이다. 다섯 번도 넘게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그 물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꽃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아, 나는 정말 뭘 읽은 거지?
나 자신이 그런 형편이었으니 누구를 탓하거나 기대할 일도 아니지만, 나는 책장을 덮자마자 문득 'MB'라는 영어 이니셜로 통하는, 그 덕분에 '2메가바이트'라는 별칭을 갖기도 했던, 이명박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는 <어린 왕자>를 읽었을까? 만약 읽었다면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라는 물음이 그에게 중요했을까? 아니,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라는 물음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두 가지 질문의 난이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 나로서는 슬픈 일이다. 우선,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라는 물음이 그에게는 '분명히' 중요하지 았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갈 데까지 간(책을 읽지 않고 독후감만 읽더라도 성적이 좋으면 그만일 만큼) 입시교육을 더욱 더 심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제고사(학업성취도평가)를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를 해직하거나 파면하는 행위를 감히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라는 물음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성과 양식을 가진 대통령이라면,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에 따라 나라의 근간인 민주주의가 실종되어가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서 시국선언을 한 교사들을 아무런 이해나 연민도 없이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MB대통령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을 터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꽃샘추위에 놀라 생명을 틔우는 것을 쉽게 포기해버린,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고 물질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 끝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우리의 불행한 대통령을 닮은.
2009.11.29 13:53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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