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85) 주유천하

[우리 말에 마음쓰기 849] '주유천하하다'와 '세상을 떠돌다'

등록 2010.01.30 17:06수정 2010.01.30 17:06
0
원고료로 응원
- 주유천하

.. 옛적에 한 고명한 선비가 주유천하하다가 산세를 둘러보고 감탄하되 ..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김현아,호미,2009) 281쪽


'고명(高名)한'은 '이름난'이나 '이름 높은'으로 다듬고, '산세(山勢)'는 '산 모양'이나 '산줄기'로 다듬습니다. '감탄(感歎)하되'는 '놀라되'나 '크게 놀라되'로 손질해 봅니다.

 ┌ 주유천하(周遊天下) :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함
 │  - 동냥 바랑이나 걸머지고 주유천하를 하기도 하고
 │
 ├ 주유천하하다가
 │→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 이곳저곳 두루 돌아다니다가
 │→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 …

우리는 한국사람이라 한국글과 한국말을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는 한국글과 한국말이 옹글게 한국글과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모양새는 한글이지만 속내는 한국글이 아니고, 생김새는 우리 말이라지만 한국말이 아니곤 합니다.

더없이 널리 쓰는 낱말인 '시스템'을 우리 말이라 여길 수 있을까요. 알파벳이 아닌 한글로 '시스템'이라 적었으니 한국글이라 생각해도 되는가요. '터치스크린'이나 '클린센터' 같은 말마디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질정을 통해 상대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예방하는 길" 같은 글줄은 어떻습니까. 이 같은 글줄이 한글로 적혔으니 한국글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이 같은 글줄을 우리 말이라고 여겨도 되겠습니까.

"천하를 주유한다"는 뜻인 네 글자 한자말 '주유천하'를 한글로 적어 놓은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낱말을 우리 글이라고 여겨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다"를 뜻한다는 이 네 글자 한자말은 어느 만큼 우리 말이라고 보아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낱말을 꼭 써야 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말마디가 아니면 우리 생각을 담아낼 수 없을까요.


 ┌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 온 세상 구석구석 찾아다니기도 하고
 ├ 온누리를 두루 둘러보기도 하고
 ├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며 구경하기도 하고
 └ …

우리한테는 우리 말과 글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땅에서 우리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을 말과 글이 남달리 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이 오로지 토박이말로만 이루어졌다거나 토박이말로는 모자라 바깥말을 많이 받아들여야 하느니를 떠나, 우리한테는 우리 말과 글이 어엿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나 이제나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아껴야 하는가를 배우지 못합니다. 이제나 저네나 이 나라 어르신이나 글쟁이나 똑똑이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는 길을 일러 주지 못합니다. 뜻있는 어버이이든 돈벌이에 바쁜 어버이이든 당신 딸아들한테 참답고 살가운 말과 글을 알차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생각하는 힘이 없다고 느낍니다. 아니, 생각하는 힘이 자꾸 억눌리고 있으며, 나중에는 우리 스스로 내 생각을 억누를 뿐 아니라 이웃과 동무 생각마저 억누르는구나 싶습니다. 처음에는 생각하는 힘을 억누리는 검은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이나 발버둥을 치지만 이내 수그러들거나 잦아듭니다. 곧이곧대로 우리 넋을 버리고 우리 얼을 내찹니다.

 ┌ 온누리마실 / 누리마실
 ├ 온누리나들이 / 누리나들이
 └ …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일이니, 우리한테는 말 그대로 '누리 + 마실'이거나 '누리 + 나들이'입니다. 그런데 글깨나 쓰고 말깨나 하는 분들치고 '누리마실'이나 '누리나들이' 같은 말마디를 살며시 지어내는 몸짓이나 손짓을 보이는 분이란 없습니다. 그예 말뜻 그대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다"고 하면 넉넉한데, 이렇게 쓰지 않고 '문자깨나 지식깨나' 뽐내려고 하면서 영어를 받아들이든 한문을 받아들이든 합니다. 이러면서 '주유천하' 같은 중국말이 스며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불러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불러들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새말 짓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고쳐쓰고, 인터넷 메일을 '누리편지'로 고쳐쓰며, 인터넷 블로그를 '누리사랑방'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이 같은 말틀을 마련했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마련한 말틀이지만 공공기관 스스로 이 같은 말틀을 따르지 않습니다.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원이나 민간학술모임인 한글학회에서 애써서 살갑거나 알맞게 말틀을 마련해 놓아도 정부기관이든 민간모임이든 깊이 살피고 돌아보며 함께할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면, '두루누리마실'처럼 또다른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두루누리나들이'처럼 새말을 지어도 됩니다. '두루누리삶'이나 '두루누리이야기' 같은 새말을 하나둘 지으면서 때와 곳에 따라 알맞게 우리 삶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 '책읽기'요, 밥을 먹어 '밥먹기'입니다. 독서지도가 아닌 '책읽기 가르침'이고, '식사하셨어요?'가 아닌 '밥먹었습니까?'나 '진지 드셨어요?'입니다. 씻는 방이라 '씻는방'이요, '욕실'이 아닙니다. 자는 방이라 '잠방'이요, '침실'이 아닙니다. 노래를 하니 '노래방'이고, 빨래를 하기에 '빨래방'이듯 말입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지 않으며,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눈길이 없으니 꾸밈없이 말짓기를 하지 못합니다.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눈길이 없는 터라 꾸밈없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꾸미며 말하고 겉치레로 글을 씁니다. 사랑스레 말하거나 믿음직하게 글쓰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얄궂음으로 찌드는 말이요, 나날이 짓궂음으로 가득하고 마는 글입니다. 한결같이 애틋하지 못하는 말이요, 언제까지나 주눅들거나 뒤떨어지고 마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고사성어 #상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세계 정상 모인 평화회의, 그 시각 윤 대통령은 귀국길
  5. 5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