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86)

―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익사 직전의 보안관' 다듬기

등록 2010.02.18 19:05수정 2010.02.1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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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 진한 정기를 내뿜고 있는 신록의 산들과 정답게 굽이돌아 흐르는 미나마타강이며, 강변과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  <이시무레 미치코/김경인 옮김-슬픈 미나마타>(달팽이,2007) 119쪽

 

"진(盡)한 정기(精氣)를"은 "짙은 기운을"로 다듬고, '신록(新綠)의'는 '푸른'이나 '푸르디푸른'이나 '싱그러운'으로 다듬습니다. '정(情)답게'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살갑게'나 '살뜰히'로 손보면 한결 낫고, '강변(江邊)'은 '강가'로 고쳐씁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거의 아무런 생각 없이 '강변도로'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강가에 낸 길"이 '강변도로'이기에 '강가길(강갓길)'이라고 적바림해야 올바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란 찾아볼 수 없고, 우리 삶터를 우리 말글로 알맞게 나타내거나 가리키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 직전(直前) : 어떤 일이 일어나기 바로 전

 │   - 퇴근 시간 직전에 겨우 일을 마쳤다 / 아이들을 익사 직전 구해 냈다

 │     잠들기 직전에는 음식을 안 먹는 것이 좋다

 │

 ├ 무르익기 직전의 보리밭

 │→ 무르익으려고 하는 보리밭

 │→ 곧 무르익을 보리밭

 │→ 막 무르익으려 하는 보리밭

 │→ 이제 막 무르익을 보리밭

 │→ 거의 무르익은 보리밭

 └ …

 

한자말 '직전'을 쓰면서 이 보기글을 가다듬어도 괜찮습니다. 이때에는 "무르익기 직전인 보리밭"이 됩니다. '직전'과 맞서는 다른 한자말 '직후(直後)'를 넣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르익은 직후인 보리밭"처럼 적으면 됩니다. 괜히 "무르익은 직후의 보리밭"처럼 적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말투를 쓰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낱말과 낱말을 'の'로 이어야 하는 일본사람이라면 'の' 노릇을 하는 토씨 '-의'를 넣어야 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우리 말과 글로 우리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는 한국사람이라 한다면 마땅히 우리 얼과 넋을 담고 있는 우리 말마디를 우리 말투에 담아야 올바르고 알맞습니다.

 

한자말을 쓰느냐 마느냐, 또는 어떤 한자말이 우리가 쓸 만한 한자말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일은 나중입니다. 처음부터 이런저런 낱말 씀씀이를 가릴 수 있습니다만, 낱말 고르기에만 매달리면서 말투와 말씨 추스르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거꾸로, 말투와 말씨는 추스르지만 낱말을 알맞게 고르지 못할 때에도 얄궂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살피면서 나란히 보듬어야 합니다.

 

 ┌ 퇴근 시간 직전에 일을 마쳤다

 │→ 퇴근을 앞두고 일을 마쳤다

 │→ 퇴근할 때가 다 되어서야 일을 마쳤다

 │→ 일 마칠 때가 거의 다 되어 끝냈다

 │→ 일 마치기 바로 앞서 다 끝냈다

 ├ 아이들을 익사 직전에 구해 냈다

 │→ 아이들을 물에 빠져 죽기 앞서 건져냈다

 │→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아이들을 살려냈다

 ├ 잠들기 직전에는

 │→ 잠들기 앞서는

 │→ 잠자리에서는

 └ …

 

말뜻 그대로 '직전'을 생각한다면 '코앞'이나 '눈앞'이나 '바로 앞'입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그때그때 다 다르게 풀어내야 하며, 자리에 따라서는 아예 달리 적어야 잘 어울리곤 합니다. "퇴근 직전"을 "퇴근을 앞두고"로 다듬을 수 있는 한편, "집으로 갈 무렵"처럼 아예 새로 적을 수 있습니다. "잠들기 직전"을 "잠들기 앞서"로 손볼 수 있는 가운데, "잠자리에서"처럼 뜻을 살리며 달리 풀어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예부터 때에 따라서 달리 말해 왔습니다. 곳에 따라서 다 다른 말투와 말씨로 우리 느낌과 마음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서 우리 말투와 말씨를 잃거나 놓느라, 게다가 자꾸자꾸 바깥말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느라, 알맞고 싱그럽고 따숩게 말하거나 글쓰던 버릇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스스로 내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줏대를 못 세우기에 이러할까 싶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우리 일과 놀이를 찾아서 즐기지 못하니 이런 모습일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삶이 우리 삶답지 못하니 우리 말이 우리 말다울 길을 놓치지 않느냐 싶곤 합니다. 몸뚱이는 한겨레이고 겉보기 글월은 한글이지만 속알맹이는 한겨레가 아니요 속 글월은 우리 말글이 아닙니다.

 

ㄴ. 익사 직전의 보안관

 

..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그는 달음질을 멈추고 되돌아가 익사 직전의 보안관을 구출해 주었다 ..  <임세근-단순하고 소박한 삶, 아미쉬로부터 배운다>(리수,2009) 95쪽

 

'도망(逃亡)칠'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내뺄'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절호(絶好)의 기회(機會)였음에도"는 "둘도 없는 기회였음에도"나 "더없이 좋은 때였음에도"로 다듬고 '익사(溺死)'는 '빠져 죽기'나 '물에 빠져 죽기'로 다듬습니다. '구출(救出)해'는 '건져'나 '살려'나 '꺼내'로 손질합니다.

 

 ┌ 익사 직전의

 │

 │→ 빠져 죽을 뻔한

 │→ 물에 빠져 죽을 뻔한

 │→ 빠져 죽을락 말락 하던

 │→ 물에 빠져 죽을락 말락 하던

 └ …

 

아슬아슬한 때에 제 몸을 바쳐 이웃을 돕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리 많지는 않다지만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이들은 우리 목숨이나 이웃 목숨도 살리지만, 목숨만 살리지 않습니다. 우리 삶과 생각을 함께 살립니다. 바치는 마음과 쏟는 사랑과 나누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거든요. 우리가 우리 목숨줄만 잇도록 하지 않고, 우리가 새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터전에서 우리가 늘 쓰는 말과 글이 벼랑에 내몰려 있습니다. 아니, 벼랑이 아닌 낭떠러지에서 한참 굴러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서 벼랑에서 살려내고자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슬프게도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낭떠러지로 함께 달려들어 밑바닥에 쿵 하고 찧지 않게끔 힘쓰는 사람 또한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말글만 그러하겠습니까. 우리 제도권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 제도권정치나 제도권공직은 어떠합니까. 돈이 넘쳐나는 서울 어느 구에서 동사무소를 천 억 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새로 짓는다고 다부지게 밝히기도 하는데, 그 어마어마한 돈으로 우리 둘레 힘겨운 이웃을 돕는 자리에는 터럭만큼도 나누지 않습니다. 문화시설이 모자라 그렇게 공사를 벌인다지만, 우리 둘레에 문화시설이 없는 데가 그 부자동네뿐이겠습니까. 그런데 부자동네를 이룬 그 어마어마한 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 물에서 허우적거리던 보안관을

 ├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 가던 보안관을

 ├ 허우적거리며 죽어 가던 보안관을

 └ …

 

내 몸만 살자면 내 삶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사랑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내 몸처럼 이웃사람 몸을 사랑한다면 서로서로 살아납니다.

 

내 배만 살찌우자면 내 배는 부르지 않습니다. 내 배가 부르는 느낌이 반갑고 좋다는 생각을 내 이웃한테도 뻗쳐 누구나 배를 곯지 않고 따숩게 살아가는 터전을 헤아릴 때 비로소 다 함께 배부릅니다.

 

내가 쓰는 말마디는 나 혼자한테만 좋을 말마디가 아닙니다. 내가 적바림하는 글줄은 나 홀로 기쁠 글줄이 아닙니다. 나누는 말입니다. 함께하는 글입니다. 어깨동무하는 말입니다. 손을 맞잡는 글입니다.

 

한 마디 말이라도 대충 써서는 안 된다기보다, 한 마디 말이기에 더욱 사랑스레 쓸 때가 아름답습니다. 한 줄 글이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기보다, 한 줄 글이기에 한결 넉넉하게 펼칠 때가 즐겁습니다. 말이란, 삶이란, 글이란, 넋이란 빛줄기와 같은 끈으로 고이 이어져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18 19:05ⓒ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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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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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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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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